인간미를 잃지 않기 위해, 내 지갑 속에 현금을 넣는다
![AI생성 이미지]](https://santanews.cdn.presscon.ai/prod/140/images/20251219/1766135255300_935005206.png)
연말을 앞둔 어느 날, 길을 찾지 못해 지하철 안에서 구세군 자선냄비 앞을 여러 차례 오가게 됐다. 기부하고 싶은 마음은 분명했지만 지갑 속에는 카드뿐이었다. 손을 내밀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반복해 지나가며, 이상하게도 마음보다 손이 먼저 부끄러워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기술의 편리함 속에서 인간적인 선택을 미루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현금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경험은, 현금이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카드와 모바일 결제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현금은 점점 불필요한 존재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일상적인 소비 대부분은 현금 없이도 해결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금이 필요한 순간은 대개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마주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구세군 자선냄비, 길거리 모금함, 갑작스럽게 도움이 필요한 이웃 앞에서는 여전히 현금이 가장 빠르고 명확한 수단이다.
이때 현금은 결제를 넘어 즉각적인 공감의 언어가 된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는 행위는 머뭇거림 없이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단말기나 계좌번호가 없어도, 현금은 그 자리에서 관계를 완성시킨다.
현금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는 실용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 소규모 상점, 급히 교통비가 필요한 상황, 혹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 값을 건네고 싶은 순간에도 현금은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 결제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현금은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수단이 된다.
소비 방식에서도 차이는 분명하다. 카드는 편리한 만큼 지출을 추상화하지만, 현금은 돈의 ‘무게’를 체감하게 한다. 지폐를 직접 꺼내는 순간 우리는 지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충동적 소비보다 꼭 필요한 곳에 쓰이게 되는 효과도 나타난다.
현금이 오가던 문화는 과거의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어릴 적 명절이나 졸업식처럼 특별한 날에 건네받던 용돈 봉투는 단순한 금전 전달이 아니었다. 봉투는 늘 특별한 날에만 등장했기에 기억에 남았고, 그 안에는 축하와 응원, 관심이 함께 담겨 있었다.
최근 들어 이런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송금은 쉬워졌지만, 그만큼 순간은 가벼워졌다. 알림창에 찍힌 숫자는 남아도, 눈맞춤과 짧은 말, 손에 건네던 감각은 기록되지 않는다. 현금과 봉투가 줄어들며, 날을 기념하는 방식 또한 변하고 있다.
그렇다고 봉투와 현금을 일상으로 되돌리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봉투는 여전히 특별한 날에만 쓰일 때 의미가 있다. 현금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그런 순간을 맞이할 준비이자, 필요할 때 마음을 즉시 꺼낼 수 있는 여지를 지니는 일이다.
카드만 들고 다니지 말자는 제안은 불편함을 감수하자는 뜻이 아니다. 기술의 편리함을 누리되, 인간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자는 이야기다. 지갑 속 지폐 몇 장은 경제적 대비가 아니라 관계를 위한 준비다.
연말 거리에서 다시 구세군 자선냄비를 마주한다면,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 수 있기를 바란다. 작은 현금 한 장이, 세상을 조금 덜 차갑게 만드는 데 쓰이기를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