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사회] "이 일, 돈 벌려고 하면 못 해요"… 거리의 노인들이 말하는 존엄

경남 진주시 천전동의 좁은 골목. 84세의 이을례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부여잡고 무거운 손수레를 끌어올린다. 종이박스가 산처럼 쌓인 손수레는 오늘 하루의 생계를 의미한다.
“이거 돈 벌려고 한다고 생각하면 못 해요. 그래도 이렇게 나오면 사람도 보고, 교회 헌금도 낼 수 있잖아요. 내 마음이 부자면 됐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보다 ‘살아 있음’의 의지가 묻어 있었다.
진주시 망경동의 또 다른 거리. 77세 박덕순 할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해 하루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나를 욕쟁이 할머니라 부르지만, 내 힘으로 사는 게 좋아요.”
박 할머니는 하루 종일 박스를 모아 고물상에 가져다 팔면 5천 원 남짓을 번다.
그러나 “집에 있으면 더 힘들다”며 다시 리어카 손잡이를 잡는다.
■ 숫자로 본 현실 — ‘평균 77세, 월수입 16만 원’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2025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3%에 달해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경남의 노인 인구 비율은 22.2%로 더 높다.
경남도의 전수조사 결과, 폐지 수집 노인의 평균 연령은 78세, 월평균 수입은 16만 원에 불과했다. 조사 대상자의 39%는 우울 증상을 겪고 있었다.
“노인정은 아무나 못 가요. 자식 자랑, 돈 자랑… 그런 데 앉아있기 힘들어요.” 고물상 주인 박영식 씨의 말처럼, 많은 어르신에게 거리의 노동은 생계이자 외로움을 잊는 유일한 사회생활이다.
■ ‘최저임금의 10분의 1’… 그래도 멈출 수 없는 이유
2017년 1㎏당 120원이던 폐지 가격은 현재 70~80원 수준이다. 하루 10시간을 일해도 벌 수 있는 돈은 1만 원 남짓. 최저임금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명절 때 자식들이 리어카 부숴놓고 가요. 그래도 또 새로 얻어서 나오세요.” 10년째 고물상을 운영하는 이철형 씨는 “이분들이 안 보이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며 울먹였다.
그는 “시에서 조사한 300명보다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분들이 없으면 골목이 쓰레기로 넘쳐날 텐데, 사회가 너무 냉정하다”고 말했다.
■ 조례는 있으나, 예산은 없다
경남도는 2019년 ‘재활용품 수집인 지원 조례’를 만들었지만 예산 부족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진주시는 아직 관련 조례조차 없다.
반면 서울, 부산 등 일부 지자체는 폐지 수집 노인을 위한 ‘재활용 정거장’을 운영 중이다.
노인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분리수거를 담당하고, 지자체는 안전교육과 수당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단순한 복지 지원이 아닌 ‘참여와 존엄’의 모델로 평가된다.
■ “이 일도 노동입니다”… 사회적 기업의 손길
서울의 사회적기업 ‘러블리페이퍼’와 ‘아립앤위립’은 폐지 수집 어르신들의 손글씨와 그림을 상품화해 판매한다. ‘못 배우면 어때, 나쁜 짓만 안 하면 되지’ 같은 문구가 새겨진 엽서와 노트는 세대를 잇는 따뜻한 위로로 이어진다.
녹색병원이 만든 ‘이어카’는 기존 리어카보다 30kg가량 가벼우며, 손잡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돼 근골격계 부담을 줄였다.
또한 광주시는 폭염기에 노인들이 폐지 수집 대신 실내에서 재활용 선별작업을 할 수 있도록 대체활동을 지원, 하루 20만 원의 수당을 지급했다.
■ “누구나 결국 노인이 된다”
폐지를 주우며 하루를 버티는 어르신들의 삶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비춘다. 그러나 그 속엔 여전히 인간의 존엄이 있다.
이을례 할머니는 오늘도 손수레를 밀며 말했다.
“젊을 땐 나도 남 도왔지요. 이제는 누가 날 불쌍하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내 손으로 하루를 버티는 게.”
초고령사회 대한민국, 이제는 ‘불쌍한 노인’이 아니라 ‘일하는 시민’으로 이들을 바라봐야 할 때다. 그들의 손수레가 더 이상 생존의 무게가 아닌, 존엄의 증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