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 나위소와 강호구가

까페 '영산나루'의 건너편에
택촌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옛날에 영산창이 있었던
역사적 공간이다.
이 마을 근처에
수운정(岫雲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송암 나위소가
말년을 보내며 <강호구가>를 완성한 곳이다.
영산포가
단순한 홍어거리만으로 만족해서는 곤란하다.
영산포 등대에
문화의 불이 켜져야 한다.
<타오르는 강>의 공연
수운정의 복원
<강호구가>와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만남.
그리고
가야산의 일출이
영산강과 연계되었을 때
영산포는 역사문화관광도시로 우뚝서리라 믿는다.
그러한 일환으로
오래 전의 원고를 여기에 소개한다.

송암(松巖) 나위소(羅緯素)와 강호구가(江湖九歌)
나상만(전 경기대학교 교수, 예술학 박사)
광주시립극단 예술감독을 마치고 목포로 낙향하기 전에 나주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주는 역사적으로 마한의 심장이었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천년 전라도의 중심도시였다.
꼭 그건 만은 아니다. 나주나씨의 관향(貫鄕)인 나주에는 내 선조들의 선영이 있고 선조들의 역사적 유적이 수두룩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주 없는 나주나씨 없고, 나주나씨 빼고는 나주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 지역에서 마지막 생을 살고 싶었다. 먼저 택촌마을 근처의 전세 아파트를 찾았다. 장소는 마음에 들었는데, 큰 평수가 없고 가장 넓은 공간이 20평 아파트였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을 보관하려면 최소한 30평은 넘어야 했다.
그렇다고 두 채의 아파트를 계약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지금의 목포로 터전을 잡았다. 영산강과 목포 바다가 동시에 보이는 지금의 전망 좋은 곳에서 10분이면 무안공(나자강)을 비롯한 역대의 조상님들 유택에 도달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서론이 길어졌다. 필자가 나주에서 점찍어둔 장소 근처에 옛날에 수운정(岫雲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가야산을 마주 보는 영산강 강변에 송암 나위소(羅緯素)가 말년에 은거한 정자였다. 니위소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초(史草)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의 저자이며 정개청(鄭介淸)의 문인이었다.
송암 나위소는 금호공 나사침(羅士忱)의 2남인 금암(錦巖) 보은현감 나덕준(羅德俊; 1553년~1604년)의 3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숙부 덕윤(羅德潤)으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그러나 12세에 모친상, 23세에 부친상과 계모상을 당하고 가세가 기울어 혼자서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다.
35세에 생원시에 합격해서 생원이 되었고 41세에 문과에 급제해 진사가 되었으며 43세에 검찰사 조존성(趙存性)의 종사관을 하고, 형조좌랑에 올랐다. 옥과현감 재직 중에 정유호란이 발발해, 체찰사 이상국(李相國)을 도와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후에 지관정랑 겸 기주관으로 승진하여 형조좌랑, 공조좌랑, 호조좌랑, 호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성균관직강, 성균관사예,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승문원판교, 동지중추부사, 승정원좌승지 등 중앙 관직 10여 년을 보냈다. 그리고 옥천현감, 임천군수, 풍기군수, 밀양부사, 광주목사, 원주목사, 경주부윤 등 20여 년의 지방 관직을 봉직했다.
송암은 71세에 관직을 은퇴한 후, 택촌마을에서 15년간 말년을 기거했다. 옛 기록을 보면 수운정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어찌나 좋은지 시인 묵객들이 선경(仙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자 이름은 중국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운무심이출수(雲無心而出峀,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에서 피어오른다. )”의 시구에서 따왔다.
<강호구가(江湖九歌)>는 조선 후기에 나위소가 지은 시조로 모두 9수이다.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암(松巖)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오랜 관직을 거쳤으나 말년에는 향리로 돌아와 1651년(효종 2)에 세운 수운정(岫雲亭)에서 지냈다. <강호구가>는 수운정의 강호(자연) 생활에서 느낀 물외한정(物外閑情), 세상 밖 자연의 한가로움을 노래한 것이다.


제1수
어버이 나셔 님금이 먹이시니
나흔德(덕) 먹인恩(은) 다 갑프랴 엿더니
焂然(숙연)히 七十(칠십)이무니 일 업서 노라
* 낳아주신 어버이와 먹여주신 임금에 대한 감사
어버이 나으시고 임금이 먹이시니
나으신 덕 먹이신 은혜 다 갚으려 하였더니
홀연히 칠십이 넘어 어이할까 하노라.
제2수
어의 聖恩(성은)이야 罔極(망극) 聖恩(성은)이다
江湖(강호) 安老(안로)도 分(분) 밧긔 일이어든
며 두아 專城榮養(전성영양)은 어인가 노라
* 강호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고, 두 아들을 보살펴주신 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사
아아, 임금의 은혜로구나. 끝이 없는 임금의 은혜로구나
강호에서 편안하게 늙어가는 것도 분수에 넘치는 일인데
하물며 두 아들이 정성으로 봉양하니 이 또한 어인 일인가 하노라.
제3수
煙霞(연하)의 깁피곤 病藥(병약)이 效驗(효험)업서
江湖(강호)에 리연더 十年(십년) 밧긔 되어셰라
그러나 이제디 묫죽음도 聖恩(성은)인가 노라
* 연하고질(煙霞痼疾)에 빠져서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는 자연생활
산수(山水)에 깊이 든 병 백약이 효험 없고
자연 속에 버려진 지 십 년이 지났구나.
그러나 아직도 살아있는 것은 임금의 은혜인가 하노라.
제4수
전나귀 밧비 모리 다 졈은날 오신 손님
보리피 구즌 뫠예 饌物(찬물)이 아조 없다
아희야 내여 워라 그물 노하 보리라
* 반찬 장만도 어려운 시골에서 손님을 맞는 소박한 생활
다리 저는 나귀 바삐 몰고 해 질 무렵에 오신 손님
보리 껍질 거친 밥에 찬거리 전혀 없다.
아이야 배를 띄워라, 그물을 놓아 고기를 낚아 보아야겠다
제5수
고 람자니 믈결이 비단일다
短艇(단정)을 빗기 노하 오락가락 興(흥)을
白鷗(백구)야 하즐겨말고려 世上(세상)알가 노라
* 달 밝은 밤에 물 위에 배를 띄워 즐기는 강호한정(江湖閑情)
달 밝고 바람 잔잔하니 물결이 비단이라
작은 배에 비스듬히 누어 유유자적하는 흥을
갈매기야 너무 즐겨 말아라, 세상 사람들이 알까 두렵다.
제6수
모래 우희 자 白鷗(백구) 閑暇(한가)샤
江湖(강호) 風趣(풍취)를 네디닐 내디닐
夕陽(석양)의 半帆歸興(반범귀흥)은 너도말만 못리라
* 갈매기와 함께하는 석양의 반범귀흥(半帆歸興)
모래 위에 자는 갈매기 한가하네
자연의 풍취가 네 것인가 내 것인가.
석양의 작은 배에 돌아오는 흥은 너도 나만 못하리라.
제7수
비 빗긴 람 낫대멘 뎌 하나
네 生涯(생애) 언마치라 슈고롬도 슈롤샤
生涯(생애)를 爲(위)호미아니라 漁興(어흥)계워 노라
* 낚싯대를 멘 어옹의 그윽한 흥취
가는 비 비낀 바람 낚싯대 맨 저 할아버지
네 생애 언제 마치려나 수고도 수고로다.
생애를 위함이 아니라 어부 흥을 즐기노라.
제8수
피燒酒(소주) 무저리 우옵다 어룬 待接(대접)
은 져닐은 말이 草草(초초)타 거마
두어라 니도 내 分(분)이니 分內事(분내사)가 노라
* 분수에 맞게 어른을 대접하는 소박한 생활
피 소주 무 겉절이 우습구나 어른 대접
남들이 이르기를 초라하다 하건만은
두어라, 이도 내 분수이니 제 분수에 맞는 일인가 하노라
제9수
食祿(식록)을 긋친 後(후)로 漁釣(어조)를 生涯(생애)니
혬없는 아들은 괴롭다 건마
두어라 江湖閑適(강호한적)이 이내 分(분)인가 노라
* 벼슬을 그만두고 낚시로 소일하는 강호한적(江湖閑適)
벼슬을 마친 뒤에 낚시로 살아가니
생각 없는 아이들은 괴롭겠다 하건마는
두어라, 강호한적이 내 분수인가 하노라.



어떤가. 작가 송암 나위소의 강호한정(江湖閑情)을 이해할 것이다. 필자가 영산강을 좋아하고 나주 택촌마을을 점지했던 이유를 알겠는가. <강호구가>는 바로 그 영산강에서의 자연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송암은 같은 남인(南人)이며 5년 연하인 고산 윤선도(尹善道)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는데, 이 점에서 그의 강호생활은 윤선도의 어부생활과 좋은 비교가 되며, 〈강호구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대학입시 학력고사의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강호구가>와 <어부사시사>는 창작 연도가 엇비슷한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위소와 윤선도라는 호남의 대표적인 사대부 부호들의 연시조는 조선 시대 전기 연시조의 전통을 조선 시대 중기까지 전형적으로 이어갔으며, 사실상 조선 시대 사대부 문학의 절정기를 구가한 국문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앞으로 송암의 문학적, 역사적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탐색할 계획이다. 무안공의 후예이며 금호공의 손자인 송암공의 후손들은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당시 호남 최고의 부호 송암의 손자들은 이만석(二萬石) 꾼이 둘이나 있었고 영남의 명문가들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무신혁명에 깊숙하게 관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송암 사후의 일이다.
참고로 윤선도는 송암이 85세로 별세하자 슬피 울며 만사(挽辭)를 썼다. 윤선도와 쌍벽을 이루며 조선 중기 사대부 문학의 절정기를 구가한 <강호구가>의 산실 ‘수운정’은 지금 없다. 그러나 송암의 시와 시조 그리고 그의 글들은 이제 되살아나고 있다. 글의 힘이다.

영산강은 오늘도 흐르고 있다.
「나위소 신도비」(羅緯素 神道碑)는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4호로 2006년 12월 30일 지정되었다.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평생 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碑)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신도비는 조선 시대 왕릉의 신도비로서 태조의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와 세종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가 있다. 또, 사대부의 신도비는 위업과 공훈을 세웠거나 도덕과 학문에 투철한 자들의 묘 앞에 큰 비를 세우고 이수(螭首)·귀부(龜趺)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조선 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적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에는 군왕보다도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나위소의 원 신도비는 17세기 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 신도비는 1716년 숙종 42년 중수되었다. 높이 140cm, 폭 63cm, 두께 22cm의 크기이며, 귀부와 이수가 “수려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기법”을 썼다고 평가된다. 신도비의 비문과 비의 글씨는 의정부 우의정 미수 허목(許穆; 1595년~1682년)이 썼으며, 송암 나위소의 일대기를 기록하였다. 신도비는 나주시 삼영동 나주나씨 집성촌 나위소 묘역 입구에 위치한다.

지난해 대종회 회보에서 필자는 <시제의 축제화와 역사 투어를 제안하며>를 통해 대종회가 각 문파의 시제와 연계하여 각 지역에 유거(幽居)하신 선조님들의 정신적 가치를 탐구하고 역사적 발자취를 탐방하는 역사 투어에 앞장서 주시길 제안하였다. 재론하지만 시제가 어르신들의 연례행사로 그쳐서는 곤란하다. 젊은 층이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콘텐츠가 개발, 활용되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장암 나위소의 <강호구가>는 젊은 종친들과 청소년들에게 충효열에 빛나는 우리 나씨가문을 소개할 수 있는 최고의 콘텐츠가 될 수 있다. 특히 교과서에까지 실리며 대입 학력고사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9편의 시조와 시를 공부하고 낭송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한다면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리라 믿는다.
아울러 송암이 선산을 지키기 위해 말년에 기거하며 문학적 업적을 이룩한 수운정(岫雲亭)은 복원되어야 한다. 수운정은 나주시민의 단순한 ‘휴식터’가 아닌 우리 국민 모두의 ‘역사문화공간’으로 재탄생되어야 한다. 그러한 연계 속에서 <나위소의 신도비>와 <강호구가>는 그 가치를 더욱 발휘할 것이다. 수운정에서 ‘송암-스타니스랍스키 시낭송 교육’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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