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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행 열차 속에서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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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도 행복했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싣고
느렸기에 풍경을 보았고, 기다렸기에 사람을 만났으며, 함께 갔기에 외롭지 않았던 여행,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서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했던 그 시절의 추억일 것이다.

추억의 완행열차,느리게 달렸기에 더 많이 보였던 시절

 

기적 소리가 들리면 마을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고 철길을 바라보곤 했다. 검은 연기를 길게 끌며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기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세상에서 온 편지였고, 누군가에게는 고향을 떠나는 이별이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기다리던 사람을 데려오는 귀향이었다.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닿는지가 중요하지 않던 시절, 완행열차는 작은 역마다 멈춰서서 사람을 태우고 내려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까지 한 칸 한 칸 싣고 천천히 달렸다.

 

돌이켜보면 완행열차의 역사는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과 닮아 있다. 보따리를 들고 장터로 향하던 어머니, 도시의 학교로 떠나던 학생,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지던 젊은이, 휴가를 얻어 가족에게 돌아가던 군인까지. 좁은 객차에는 가난했지만 내일을 믿었던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했다. 

 

산업화와 함께 도시가 커지면서 철길은 사람과 물자를 나르는 국가의 동맥이 되었다. 느릿하던 열차는 통일호와 무궁화호를 거쳐 오늘의 고속철도로 이어졌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데 하루가 걸리던 시절에서 이제 몇 시간이면 닿는 시대가 되었으니, 열차의 속도에는 우리가 이룬 압축성장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는 오래된 완행열차를 그리워한다. 그것은 낡은 열차에 대한 향수라기보다 천천히 가도 괜찮았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차창 밖으로 논과 밭이 흐르고, 낯선 간이역에 기차가 멈추면 삶도 잠시 쉬어 갔다. 객차 안에서 삶은 달걀과 귤을 나누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낯선 사람도 어느새 여행의 동행이 되었다.

 

창밖으로는 늦은 오후의 평화로운 들판이 천천히 흘러간다. 햇살을 머금은 논은 잔잔한 금빛으로 빛나고, 낮은 산등성이에는 옅은 안개가 부드럽게 걸려 있다. 강물은 철길을 따라 느긋하게 굽이치고, 드문드문 자리한 시골집의 굴뚝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름 모를 들꽃과 오래된 전봇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차창 너머로 지나갈 때마다 잊고 있던 계절들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목적지에는 늦게 도착했지만, 그 길에서 더 많은 풍경과 사람을 만났다. 기다리는 법과 함께 가는 법도 배웠다. 완행열차의 느린 속도는 지나온 삶을 돌아볼 여백을 선물한다. 창문에 비친 모습은 어느새 젊은 날의 얼굴과 겹쳐지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함께 견뎌온 날들, 놓쳐버린 기회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까지도 이제는 모두 한 편의 따뜻한 여행이 되어 마음속에 머문다.

 

그래서 완행열차는 문학과 대중문화 속에서 떠남과 귀향, 사랑과 이별, 기다림과 그리움의 공간으로 되살아난다. 플랫폼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과 차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는 말로 다 전하지 못한 사연이 있었다.

 

 철길은 현실에서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긴 문장처럼 이어졌다. 기차가 떠난 뒤 텅 빈 승강장에 남은 쓸쓸함마저 아름다웠던 것은 그 시절의 여행에 기다림이라는 여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빠른 철도와 편리한 교통의 시대를 살아간다. 이는 분명 자랑스러운 발전이며 우리가 일구어낸 성취다. 하지만 인생까지 고속열차처럼 살 필요는 없다. 빨리 도착한다고 반드시 잘 도착하는 것은 아니며, 앞서간다고 더 나은 삶이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작은 역에 멈춰 뒤따라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한 대의 완행열차인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이 객차에 올라 잠시 함께하다 어느 역에서 내리고 빈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사람이 앉는다. 어떤 만남은 한두 정거장에 그치고, 어떤 인연은 먼 곳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누구도 영원히 같은 객차에 머물 수는 없다. 그래서 함께 달리는 지금이 더욱 소중하다.

 

오늘도 세상은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 하지만 문득 오래된 완행열차의 창가에 앉아 천천히 흐르는 들판을 바라보던 시절을 떠올린다. 느렸기에 풍경을 보았고, 기다렸기에 사람을 만났으며, 함께 갔기에 외롭지 않았던 여행.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완행열차가 아니라 서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했던 우리의 한때인지도 모른다.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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