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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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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서 나눠요, ’소분모임‘의 유행
수박 한 통도 나눠요 / AI 생성 이미지

 

‘소분모임’의 확산, 함께 사서 나누는 새로운 연대의 방식

 


‘같이 사서 나누자’… 소비의 새로운 풍경

 

요즘 대형마트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로운 소비문화가 있다. 바로 ‘소분모임’이다. 
대용량 식자재, 생활용품, 꽃다발이나 과일 상자 등을 여럿이 함께 구입해 나누는 이 모임은 단순한 절약 행위를 넘어선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 박스는 너무 많아요’, ‘냉동실이 작아서 다 못 넣어요’라는 1인·2인 가구의 현실적인 목소리에서 출발한 이 흐름은 ‘함께 사서 나누는’ 연대의 감성으로 진화하고 있다. 네이버 카페, 당근마켓, 맘카페 등지에서는 ‘소분모임 같이 하실 분’이라는 글이 매일같이 올라온다. 고기, 밀키트, 김장재료, 제철과일뿐 아니라 플라워마켓에서 산 꽃을 함께 나누는 ‘꽃 소분모임’도 성황이다.

 


경제적 이유와 심리적 보상의 교차점

 

소분모임의 첫 번째 동력은 단연 경제적 효율성이다. 고물가 시대에 대량 구매로 단가를 낮추고, 필요한 만큼만 가져감으로써 소비 효율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적으로 보면, 이 현상은 단순히 절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소비 행위는 원래 개인적이지만, 소분모임은 이를 사회적 관계의 장으로 바꿔놓는다.
사회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소속감을 느낄 때 정서적 안정과 만족을 얻는다. 
코로나19 이후 개인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시 관계의 끈을 찾고 있다. 소분모임은 필요해서 만났지만, 정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소규모 연대의 실험장이다.

예를 들어, 서울 마포구의 한 주부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마켓 앞에서 만나 각자 필요한 식재료를 소분한다. 처음엔 단순한 공동구매였지만, 이제는 서로 반찬을 나누고 아이들 간식 이야기를 나누는 친목모임으로 발전했다. 경제적 절약이 정서적 교류로 이어진 것이다.

 


나눔과 신뢰가 만드는 공동체 심리

 

소분모임의 핵심은 신뢰다.
누군가 먼저 돈을 내고, 나머지는 나중에 정산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신뢰는 모임 구성원 간의 심리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사회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신뢰의 형성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소분모임은 바로 이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생활 속 사회 자본을 재생산하는 공간이다.
각자의 냉장고 사정, 식습관,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일상 속 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

최근에는 ‘꽃 소분모임’이 감성소비 트렌드와 맞물려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 다발에 2만 원이 넘는 수입 꽃을 네 명이 나눠 5천 원씩 부담하고, 각자 작은 꽃병에 꽂아 SNS에 올린다.
합리적 사치와 공유의 미학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문화다.
꽃을 나누며 ‘요즘 기분이 어때요?‘ ‘집에 향기 나니까 좋아요‘같은 대화가 이어지고, 이는 일상 속 정서적 교류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세대별로 다른 참여 동기

 

2030대 1인 가구에게 소분모임은 경제적 실속과 사회적 연결을 동시에 얻는 수단이다.
반면 4050대 주부들에게는 나눔의 미덕과 생활의 여유를 표현하는 장이다.
또한 MZ세대는 감각적인 소비 공유를 즐긴다.
예쁜 소분 패키지를 직접 만들거나, SNS에 우리 모임 소분 인증샷을 올리며 일종의 소비 커뮤니티 브랜딩을 즐긴다.
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정체성을 함께 공유한다.

 


기업과 지자체도 주목하는 생활 공유경제

 

이제 소분모임은 비공식적 소비 문화에서 공유경제의 생활형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일부 대형마트는 소분존을 마련해 고객이 현장에서 물건을 나눌 수 있게 했고, 지방자치단체들도 공동구매·소분 지원사업을 실험 중이다.
서울시는 공유냉장고 프로젝트에 이어 소분 나눔 스테이션을 도입해 지역 주민들이 식자재를 함께 나누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다.
이처럼 소분모임은 개인 소비를 넘어 지속 가능한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심리적 결속에서 사회적 가치로

 

전문가들은 소분모임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사회적 신뢰 회복의 장치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소비심리가 극도로 개인화된 시대에, 함께 산다는 행위는 관계의 회복을 상징한다.
소분은 단지 물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온기, 삶의 태도를 나누는 행위다.
이는 사회심리학적으로 상호호혜성(reciprocity)을 강화하며,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높인다.

 


나눔경제의 일상화

 

전문가들은 향후 소분모임이 디지털 플랫폼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AI 추천을 기반으로 비슷한 생활패턴의 사람들을 매칭해주는 소분매칭 앱, 지역별 냉장보관 공유소 등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환경·윤리소비 트렌드와 결합해 제로웨이스트 소분문화로 확산될 수도 있다.

결국 ‘소분모임’은 단순한 절약 습관이 아니라, 고립된 사회 속에서 관계를 복원하려는 집단적 심리의 표현이다.
작은 나눔이 모여 관계를 잇고, 신뢰를 만들며 사회의 온도를 높이는 흐름, 그것이 바로 오늘날 소분모임이 유행하는 이유다.

 

안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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