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과 몸까지 기부한 연세대 명예교수

교육자로 살아온 길, 나눔으로 마무리하다
연세대학교 생명시스템대학 명예교수였던 고(故) 신영오 교수(85)가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평생 학문과 교육에 헌신한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재산과 자신의 몸을 기부하며 깊은 울림을 남겼다. 재산 대부분을 사회와 학교에 내어놓고, 별세 이후에는 시신을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용으로 기증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단순한 ‘기부’를 넘어, 교육자로서의 마지막 강의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집과 땅, 그리고 몸까지 내놓은 결단
신 교수는 생전 자신이 오랫동안 거주해온 서울 염리동의 집과 부지를 연세대학교와 대한성서공회에 신탁했다. 처음 기부 의사를 밝힌 2015년 당시 약 70억 원으로 평가되던 부동산은 현재 200억 원 규모로 불어났다. 이는 단순한 재산 증여가 아니라, 평생 몸담았던 교육 현장과 신앙 공동체에 마지막까지 헌신하고자 한 철학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그의 나눔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신 교수는 자신의 시신을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해 의학 교육의 귀중한 자원이 되도록 했다. 그의 아내 역시 함께 시신 기증 서약에 참여하며 뜻을 같이했다. 지인들조차 부고장에 적힌 ‘연세대학교’라는 장지를 보고서야 그의 마지막 선택을 알게 될 정도로, 생전 그는 겸손하게 이 사실을 숨겼다.
가족과 학교가 이어간 뜻
연세대는 집을 학교에 기부한 뒤 거처가 없어진 부인을 위해 교내 숙소 ‘에비슨하우스’를 제공하며 고인의 뜻을 기렸다. 그의 딸 신애선 서울대 의대 교수는 “아버지는 늘 교육 말고는 물려줄 게 없다고 말씀하셨다”며 “그 신념이 자연스럽게 기부와 시신 기증으로 이어졌다. 가족 모두가 그 뜻을 존중했다”고 회상했다.
대학 관계자 역시 “신 교수의 선택은 단순히 사회 지도층의 의무를 넘어선, 품위 있는 마무리의 본보기”라며 “그 고귀한 뜻을 오래도록 지켜나가겠다”고 밝혔다.
학문과 사회에 남긴 발자취
신 교수는 1961년 연세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주립대에서 토양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1973년 귀국해 연세대 이과대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연세대 농업개발원 원장을 맡으며 당시 낙후돼 있던 국내 낙농업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특히 ‘연세우유 생크림빵’으로 유명해진 연세유업의 전신이 바로 이 농업개발원이다. 신 교수는 우유 대중화의 기반을 닦으며 한국 낙농업 발전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동시에 토양학자로서 국내 토양 분류 체계를 새롭게 확립하고, 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학문적 기여도 남겼다.
웰다잉의 본보기
고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철학도 뚜렷했다. 그는 “잘 사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잘 떠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선택은 죽음을 ‘종착점’이 아닌 ‘최후의 나눔’으로 승화시킨 사례로, 웰다잉(품위 있는 죽음)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웰다잉은 중요한 화두다. 고령화가 심화되고, 개인의 죽음 이후 사회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신 교수의 사례는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재산뿐 아니라 육신마저 남김없이 내어주며, “떠난 뒤에도 교육자로 남고 싶다”는 메시지를 후학들에게 전했다.
교육자이자 나눔의 사람으로 기억되다
신영오 교수의 삶은 학문적 성취와 사회적 책임,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 나눔으로 점철돼 있다. 그의 장례는 연세대학교에 마련되었고, 유족과 학교는 그의 뜻을 오래도록 기릴 것을 다짐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 그리고 “진정한 웰다잉이란 무엇인가?” 신 교수의 선택은 그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분명한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