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에서 발견된 '200종 신종 거대 바이러스'…지구 생태계를 뒤흔드는 조용한 조절자들

지구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가득한 행성이다. 특히 바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접근이 쉽지 않은 심해는 ‘지구 속 또 다른 우주’라 불릴 만큼 알려진 정보가 적다. 최근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해양학과 연구팀이 심해에서 전례 없는 과학적 발견을 해내며 다시금 전 세계 과학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연구팀은 세계 9개 해역에서 수집한 바닷물 샘플을 정밀 분석해 총 230종의 거대 바이러스 유전자를 찾아냈으며, 이 가운데 200종 이상은 인류가 이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신종 바이러스였다. 이는 바이러스 분야에서 최근 몇 년간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 중 하나로 꼽힌다.
메타 유전체 분석으로 드러난 미지의 생명체
이번 연구가 특별한 이유는 탐지 방식에 있다. 일반적인 생물학 연구는 유기체를 직접 채집해 관찰하거나 배양하는 방식이지만, 이번엔 '메타 유전체 분석(Metagenomic Analysis)'이라는 첨단 기법이 사용됐다. 이 기법은 바닷물에 섞인 다양한 생명체의 DNA 조각을 동시에 분석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나 바이러스까지 탐지할 수 있다.
연구팀은 그중에서도 'BEREN(Bioinformatic tool for Eukaryotic virus Recovery from Environmental metageNomes)'이라는 바이러스 특화 분석 도구를 활용해, 기존 기술로는 포착하기 힘들었던 수많은 바이러스 유전자를 선별해냈다. 이렇게 도출된 데이터는 단순히 숫자로서의 발견을 넘어서, 바이러스가 지구 생명 시스템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거대 바이러스’
일반적인 바이러스는 매우 작고 단순한 구조로, 생명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스스로 생명 활동을 하지 못하고, 숙주 세포에 침투해 유전자를 복제함으로써만 존재를 유지한다. 때문에 오랜 시간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는 존재’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거대 바이러스들은 이 정의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들은 일반 바이러스보다 수십 배 크고, 유전자 수도 월등히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몇몇 생물보다 더 복잡한 유전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살아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생명의 스펙트럼”이라 설명한다.
그동안의 거대 바이러스는 주로 토양 속 아메바 같은 원생생물을 감염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 발견은 해양 단세포 조류—즉,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세조류(algae)—에 감염되는 새로운 유형임을 보여주었다.
해양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관리자
단세포 조류는 해양 먹이사슬의 최하단에 위치하면서도 생태계 전체를 지탱하는 핵심 생물이다. 이들은 태양빛을 이용한 광합성으로 지구 대기 중 산소의 50% 이상을 만들어내며, 동시에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탄소 순환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들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는 단순한 병원체가 아니라, 해양 생태계의 균형을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관리자’라 할 수 있다. 거대 바이러스가 조류의 개체 수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시켜주는 메커니즘은, 물속의 영양염류 농도, 먹이사슬 구조, 지구 온난화 대응 등 다양한 환경 변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연구팀은 "이러한 바이러스의 존재는 해양 생태계가 단순한 먹고 먹히는 피라미드 구조가 아니라, 상호 얽히고설킨 복잡한 조절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특히 해양 환경 변화나 기후위기 상황에서 이들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분석하면, 미래 지구 생태 변화 예측에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심해 연구, 지구 미래의 열쇠?
이번 연구는 아직도 인간이 지구를 얼마나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류는 우주 탐사에는 막대한 자원과 기술을 투입하고 있지만, 정작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 그중에서도 심해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바다 깊은 곳이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해양 바이러스, 심해 열수분출공, 극한 환경 생물 등은 기후 변화, 탄소 저장, 생물 다양성 보존, 신약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래 기술과 과학의 돌파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연구팀은 “심해의 바이러스는 단지 해양학적인 의미를 넘어, 생명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게 만들고 있다”며 “앞으로도 더욱 정밀하고 통합적인 생명 탐사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