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예술
문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휴먼 드라마

류재근 기자
입력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가미했다
역사와 상상의 경계 위에 선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인간 단종을 상상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왕의 또 다른 얼굴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와 상상의 경계에서 –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그린 단종의 또 다른 얼굴
 

조선의 비극적 군주 단종은 한국사에서 가장 강렬한 상징성을 지닌 인물 중 하나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 수양대군에게 폐위되고, 영월로 유배돼 생을 마감한 비운의 군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바로 이 단종의 삶을 출발점으로 삼되, 역사 기록의 빈틈에 과감한 상상력을 덧입힌 작품이다. 

 

‘유배지의 왕이 백성을 직접 만난다’는 설정은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그 상상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또렷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 영화의 중심 서사는 단종이 유배지에 갇힌 채 역사 속에서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민초들과 삶을 나누며 ‘왕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작품 속 단종은 엄격한 감시를 피해 산골을 벗어나 장터와 마을을 오가고, 농부와 상인, 떠돌이 광대까지 다양한 백성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궁궐에서 배운 통치의 언어가 아닌, 삶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 영화는 이 만남을 통해 ‘왕과 백성’이라는 수직적 관계 대신 ‘사람과 사람’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실제 역사와는 분명한 거리감을 지닌다. 

사료에 따르면 단종은 영월 청령포와 관풍헌 등지에서 엄격한 감시 속에 생활했으며, 자유롭게 유배지를 벗어나 백성을 만났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속 단종의 행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상상이다. 

이 점에서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 재현물이라기보다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정치적 음모나 권력 투쟁보다 정서와 관계에 초점을 맞춘 연출이다. 

수양대군과 대신들의 권력 다툼은 배경으로 물러나 있고, 화면의 대부분은 자연 풍경과 소박한 민초들의 일상으로 채워진다. 

이는 단종의 고독과 대비되며, 동시에 그가 잃어버린 ‘왕의 자리’보다 얻고자 했던 ‘사람의 자리’를 강조한다. 카메라는 화려함 대신 절제된 톤을 유지하고, 음악 역시 감정을 과잉시키기보다는 여백을 남기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결국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적으로 맞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이 상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는 영화다. 

유배지를 벗어난 단종은 실존하지 않았지만, 백성과 함께 웃고 울었던 왕의 모습은 오늘날 권력과 책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역사 교과서의 단종이 아니라, 인간 단종을 상상함으로써 관객에게 묻는다. 

왕은 자리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아니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가.

 역사와 상상의 경계 위에 선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 질문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데 있다.


 

류재근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