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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사랑은 기쁨인데” 짐이 된 ‘비자발적’ 황혼 육아
맞벌이·고물가·돌봄 공백 속 조부모 의존 심화 — “노후가 사라진다” 호소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 세대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은 여전히 조부모다.
하지만 손주를 돌보는 일이 ‘기쁨’이 아니라 ‘의무’가 되는 순간, 황혼의 삶은 무거워진다.
최근 맞벌이 가정 증가와 돌봄 인프라 부족이 맞물리며 조부모 세대의 ‘비자발적 황혼 육아’ 문제가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 가운데 53.3%는 “자녀의 사정상 거절하지 못해 육아를 맡고 있다”고 응답했다.
자발적 선택보다는 가족 관계와 현실적 압박 속에서 육아를 떠안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68세 김모 씨는 평일 오전 7시면 손주를 데리러 집을 나선다.
어린이집 등원과 하원은 물론 저녁 식사까지 챙기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김 씨는 “딸 부부가 맞벌이라 어쩔 수 없는 걸 안다”면서도
“몸이 아픈 날에도 쉬지 못하는 현실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령층의 육아 부담은 단순한 시간 제공을 넘어 체력과 건강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손주를 장시간 돌보는 조부모들은 무릎·허리 통증, 수면 부족, 우울감 등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후를 위한 여가나 인간관계, 자기계발 계획도 뒤로 밀린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돌봄 공백을 지적한다.
긴 노동시간과 높은 사교육 부담, 부족한 공공 돌봄 시설이 결국 가족 내부 해결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특히 영아 돌봄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조부모 의존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조부모 육아가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성격은 크게 달랐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대가족 문화 속에서 조부모가 자연스럽게 양육 공동체의 일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가족 구성원 전체가 함께 아이를 돌보는 개념에 가까웠다.
오늘날처럼 은퇴 이후 노년의 시간을 희생하며 전담 육아를 수행하는 형태와는 차이가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 역시 ‘황혼 육아 대국’으로 불린다.
도시화와 맞벌이 증가로 인해 조부모가 손주 양육을 책임지는 비율이 매우 높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는 은퇴 후 지방에서 올라와 손주를 돌보는 ‘철새 조부모’ 현상까지 나타난다. 하지만 중국 사회에서도 “노인의 삶이 가족 돌봄에 과도하게 종속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
일본에서는 ‘손주 피로’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초고령 사회 속에서 고령의 조부모들이 체력 한계를 호소하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육아 쉼터와 공공 돌봄 서비스를 확대하는 추세다.
일부 지역에서는 조부모 대상 육아 교육 프로그램과 심리 상담도 운영하고 있다.
반면 북유럽 국가들은 국가 중심 돌봄 체계가 비교적 잘 구축돼 있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공공 보육시설 이용률이 높고 부모 육아휴직 제도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조부모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가족 간 도움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의무처럼 굳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국내에서도 조부모 돌봄 수당과 공동육아 지원책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단순 현금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는 부모 세대가 아이를 직접 돌볼 수 있는 노동 환경 개선과 촘촘한 공공 돌봄 시스템 확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족 간 돌봄은 분명 따뜻한 사랑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이 희생만으로 유지될 때, 누군가의 노후는 조용히 무너질 수 있다.
손주의 웃음 뒤에 가려진 조부모 세대의 피로와 침묵을 사회가 더 이상 개인의 헌신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