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연말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연말은 전 세계가 동시에 맞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결코 같지 않다.
어떤 문화는 시간을 씹어 넘기고,
어떤 문화는 자연에 맡기며,
어떤 문화는 불태우고,
어떤 문화는 조용히 비운다.
나라별로 보면 흩어져 보이던 연말 풍경은
두 나라씩 나란히 놓았을 때
각 문화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또렷해진다.
■ 스페인 × 브라질
시간을 삼키는 나라, 자연에 맡기는 나라

스페인의 새해는 시계와 함께 시작된다.
자정이 되면 종소리에 맞춰 포도 12알을 먹는다.
한 알은 한 달을 뜻한다.
종은 빠르고, 포도는 많다.
웃음과 실수가 섞일 수밖에 없다.
이 풍습이 흥미로운 이유는
완벽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연말은
“시간을 통제하겠다”기보다
시간을 몸으로 통과하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반면 브라질은 시간을 자연에 맡긴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 해변으로 향한다.
파도에 꽃과 소원을 띄우며
바다의 여신에게 새해를 부탁한다.
브라질의 연말은 밝고 화려하지만,
그 핵심은 내려놓음이다.
개인이 감당하지 못한 바람과 걱정을
자연에게 잠시 맡기는 방식이다.
시간을 삼키는 스페인과
자연에 맡기는 브라질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다가올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 일본 × 북유럽
소리로 덜어내는 연말, 침묵으로 견디는 연말

일본의 연말은 소리로 시작해 소리로 끝난다.
12월 31일 밤, 사찰에서는 종을 108번 울린다.
인간의 번뇌를 하나씩 덜어낸다는 의미다.
이 종소리는 새해를 부르는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지난해를 정리하는 소리다.
일본의 연말이 유난히 고요한 이유다.
여기서 연말은 축제가 아니라 수행이다.
북유럽의 연말도 비슷한 결을 가진다.
핀란드와 스웨덴 등에서는
촛불, 단출한 식사, 가족 중심의 시간이 이어진다.
긴 겨울과 어둠에 익숙한 이들은
어둠을 몰아내려 하지 않는다.
대신 어둠과 함께 앉아 있는 법을 택한다.
일본이 소리로 마음을 덜어낸다면,
북유럽은 침묵으로 시간을 견딘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문화 모두 연말을
‘비워야 다음이 온다’는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 에콰도르 × 콜롬비아
말하지 않고, 불태워 끝내는 한 해

에콰도르와 콜롬비아에서는
연말이 되면 ‘아뇨 비에호(Año Viejo)’라 불리는 인형을 만든다.
그 안에는 한 해 동안 쌓인
분노, 후회, 불운이 담긴다.
그리고 자정이 되면
그 인형을 불태운다.
이 의식은 매우 직접적이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눈에 보이게 처리한다.
불은 선언이다.
“이건 여기서 끝이다.”
말로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 연말.
남미의 이 풍습은
감정을 쌓아두지 않겠다는
강한 생활의 태도를 보여준다.
■ 중국 × 미국
시간을 잇는 식탁, 관계를 선택하는 식탁

중국의 연말은 식탁에서 완성된다.
춘절 전야의 가족 식사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의례다.
만두, 생선, 길쭉한 면에는
복과 장수, 화합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식사는 새해를 부르는 자리가 아니라
관계를 다시 잇는 자리다.
중국의 연말은
시간보다 사람을 먼저 확인한다.
미국의 연말 역시 식탁이 중심이지만
그 의미는 조금 다르다.
혈연이 아니어도 괜찮다.
친구, 이웃, 동료 등
함께 한 해를 돌아볼 사람이면 충분하다.
미국식 연말은
가족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관계로 확장한다.
두 나라 모두 식탁에 모이지만,
하나는 이어진 시간을,
하나는 선택한 관계를 확인한다.
■ 한국
비우고, 씻고, 감사하며 보내는 연말

한국의 민속적 연말은
어느 나라보다 조용하다.
동지에는 팥죽으로 액운을 막고,
섣달그믐에는 묵은 일을 정리하며,
납일에는
“올해도 무사히 살았다”고 고했다.
불을 피우지도,
소리를 키우지도 않는다.
대신 비우고, 씻고, 감사한다.
■ 그래서 지금, 이렇게 다시 살아난다
오늘날에는
제사상이나 의식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아도
민속의 정신은 이어진다.
* 쓰지 않은 물건을 정리하며 한 해를 닫고
*샤워와 휴식으로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성과 대신 “여기까지 온 나”에게 감사하는 방식
종교를 묻지 않고,
강요하지 않으며,
혼자서도 가능한 연말.
그래서 한국의 민속적 연말은
지금 시대에 가장 조용히 어울린다.
■ 연말은 축제가 아니라, 통과의례
세계를 나란히 놓고 보면
연말은 어디서나 하나의 통과의례다.
누군가는 시간을 삼키고,
누군가는 자연에 맡기며,
누군가는 불태우고,
누군가는 비운다.
방식은 달라도
모두 같은 질문 앞에 선다.
“이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가.”
한국의 민속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해왔다.
“올해도, 무사히 살았다.”
요란하지 않아도,
보여주지 않아도,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