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뉴스/오늘 산타
오늘의 산타

26년째 이어진 침묵의 기부

성연주 기자
입력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올해도 9천만원 남기고 사라지다
전주 얼굴없는 천사가 놓고 간 상자.[전주시 제공]
전주 얼굴없는 천사가 놓고 간 상자.[전주시 제공]

 

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성금을 남기고 떠났다. 2025년 12월 30일 오후,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 인근에 현금과 동전이 담긴 상자 한 개가 놓였고, 확인 결과 기부액은 9001만2500원이었다. 이로써 26년간 누적 기부액은 11억 원을 넘어섰다.


이날 오후 3시 43분께 주민센터에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중년 남성은 “기자촌 한식뷔페 앞 소나무에 상자 하나를 두었다. 좋은 곳에 써달라”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직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상자 안에는 오만원권 묶음과 동전이 든 돼지저금통, 짧은 손 편지가 들어 있었다.


손 편지에는 새해 인사가 적혀 있었다. “2026년에는 좋은 일들만 있었으면 합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름도, 직업도, 이유도 남기지 않은 메시지는 매년 이맘때 반복돼 왔다.


전주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는 2000년 4월, 58만4000원이 담긴 돼지저금통 하나로 시작됐다. 이후 매년 연말이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금액은 달라졌지만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신분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기부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2019년에는 주민센터 인근에 놓아둔 성금이 도난당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해 이후에도 기부는 중단되지 않았다. 전주시는 “익명 기부자의 뜻에 따라 성금은 노송동 지역의 소년소녀가장과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오랜 선행은 지역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전주시는 주민센터 일대 도로를 ‘얼굴 없는 천사길’로 조성했고, 기부를 기리는 기념비도 세웠다. 주민들은 매년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정해 나눔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한 사람의 익명 선택이 공동체의 기억이 된 셈이다.


익명 기부는 숫자로만 보면 통계의 한 항목일 수 있다. 그러나 반복과 지속은 의미를 만든다.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가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매년 같은 자리에 같은 마음을 놓고 간다는 점에서다.

기부자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돈의 용도와 방향만 분명히 했다.
그 선택은 도움을 받는 이웃의 겨울을 바꾼다.
조용한 행동이 오랜 신뢰가 되는 순간이다.
전주의 연말이 매년 따뜻한 이유이기도 하다

성연주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