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안이 만난 작가] 감정의 실을 따라, 기억의 풍경을 짓다 - 지현정 작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K-LIZ Gallery에서 열리는 지현정 작가의 개인전 《THREAD : Bound by Fate》는 감정의 흐름과 기억의 잔상, 그리고 관계의 얽힘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실, 머리카락, 물, 꽃 등 유기적인 이미지들이 화면 위에서 감정의 풍경을 만들어내며, 관람객은 그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실들이 우리를 이어주고 있어요.”
— 지현정
감정의 실을 좇는 여정
지현정 작가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감정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데서 출발한다. 초기에는 바람이나 물결 같은 선의 흐름으로 감정을 표현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선은 점차 실이 되고, 머리카락과 매듭의 이미지로 구체화되었다. 작가는 실의 얽히고 풀리는 특성이 인간 감정의 복잡성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그 감정의 궤적을 따라 지금의 작업 세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어요.”

중학생 시절, 혼자 미국으로 이주했던 경험은 작가의 작업 세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환경 속에서 느낀 외로움과 소외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그림이라는 방식으로 서서히 흘러나왔다. “그 시절의 감정은 저를 감정의 결에 민감하게 만들었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흐름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65 x 53 cm 15F Acrylic and Gouache on Hanji 2025
실, 운명과 관계의 상징
작가에게 실은 감정의 흐름이자 정체성의 흔적이다. 실은 머리카락, 끈, 매듭 등 다양한 이미지로 확장되며, 운명과 기억, 관계를 연결하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실은 얇고 연약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아요. 어떤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기도 하죠. 그 흐름 자체가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작품 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린 소녀는 작가의 자화상이자 감정의 매개체다. “그 아이는 저 자신이기도 하고, 관객과 감정을 공유하는 그릇이에요. 때로는 과거의 나, 때로는 지금의 나, 또는 나도 알 수 없는 감정 그 자체일 때도 있어요.” 그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창구다.
아름다움과 긴장감의 공존
지현정의 화면은 서정적이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기운을 품고 있다. “감정을 단일한 상태로 그리기보다,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상태로 표현하고 싶어요. 아름다움 속에 슬픔이 있고, 평온한 장면 속에 불안이 숨어 있는 것처럼요.” 색채 역시 선명하면서도 아릿한 긴장감을 품고 있다.
동서양의 미학적 융합

162.2 x 130.3 cm 100F Acrylic and Gouache on Hanji 2025
작가의 화풍은 동양화의 선, 서양 회화의 색채, 현대 일러스트레이션의 감성이 조화롭게 녹아든 독창적인 미학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자란 그녀는 동양적인 선과 미감을 바탕으로, 미국에서의 교육을 통해 색채와 구성에 대한 감각을 확장했다. “다양한 시각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나오게 된 것 같아요.”
내면을 향한 시선
작품 속 인물들은 종종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린다. 이는 외부가 아닌 내면을 향한 몰입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 시선들은 조용한 사색의 시간, 감정을 정리하고 받아들이는 상태예요. 내면 깊은 곳에서 감정과 연결되고 있는 장면이죠.”
물, 감정과 기억의 그릇

130.3 x 97.0 cm 60F Acrylic and Gouache on Hanji 2025
Where Memories Swim’처럼 물의 이미지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기억은 물처럼 유동적이고, 때로는 선명하게 떠오르거나 잔잔한 수면 아래 가라앉기도 하죠.” 물은 감정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Thread-scape’ 연작은 인물 없이도 감정의 풍경을 구현하려는 실험적 시도다. 땋은 머리카락과 꽃들이 얽혀 있는 구조는 감정과 기억이 만든 풍경, 즉 ‘감정의 풍경화’다.

45.5 x 45.5 cm 10F
Acrylic and Gouache on Canvas 202
「Under the Blossoms, the Wound Sleeps」에서는 나무줄기의 붉은 틈이 상처를 상징하고, 그 위에 피어난 꽃들이 치유의 순간을 암시한다.

72.7 x 60.6 cm 20F Acrylic and Gouache on Hanji 2025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치유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 아픔이 덜 아픈 기억으로 바뀌는 것—그 과정이 진짜 치유라고 느껴요.”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꿈에서 본 장면, 문득 떠오른 기억, 감정의 잔상들을 스케치로 흘려보낸다. “감각과 직관이 작업을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녀의 작품은 의식적인 스토리텔링보다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직관적으로 전개된다.

이안 로버트슨 교수의 평론: 감정의 풍경을 짓는 예술
이안 로버트슨 교수(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前 런던 소더비 인스티튜트 학과장)는 지현정의 작품을 “감정의 풍경을 짓는 예술”이라 평한다. 그는 그녀의 작업이 C.S. 루이스가 『네 가지 사랑』에서 말한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스토르게의 사랑을 시각적으로 탐구한다고 말하며, “표면적으로는 낭만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고뇌와 숭고함, 그리고 감정의 폭발 직전의 긴장감이 자리한다”고 분석한다.
작품 속 머리카락은 물결처럼 흐르며, 선은 감정의 흐름을 상징한다. 「보이지 않는 실」에서 천사 같은 아이는 머리카락에 감싸여 우주적 충만감과 무기력 사이를 오가고, 「뱀의 속삭임」에서는 에덴의 루시퍼를 연상시키는 소녀와 뱀의 암묵적 동조가 쾌락과 나태를 동시에 암시한다. 「기억이 헤엄치는 곳」에서는 물의 흐름을 통해 감정의 유영을 표현하며, 도가적 삶의 궁극적 형태를 선언한다.
로버트슨 교수는 “지현정의 예술은 자아 분석을 넘어 집단적 무의식의 저장소로서 기능한다”며, 그녀의 작품이 개인의 감정을 넘어 보편적 정서와 연결된다고 강조한다.

130.3 x 97.0 cm 60F (each) Acrylic and Gouache on Hanji 2025 [사진 : SUYE 작가]
감정의 여운을 품고 돌아가길
작가는 관객에게 해석보다 ‘멈춤’과 ‘감정의 여운’을 권한다. “그림 앞에서 잠시 멈추고, 자신만의 감정을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해요. 제 그림이 누군가의 내면 깊은 곳을 조용히 건드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시 정보
- 전시 제목: THREAD : Bound by Fate
- 작가: 지현정 (Ji Hyunjung)
- 전시 기간: 2025년 7월 23일 ~ 8월 23일
- 전시 장소: K-LIZ Gallery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84길 10, B1)
- 문의: 02-517-6835 /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