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넘어 인술로 독립운동을 이어간 의료인들
![1917년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식 당시 학사모를 쓴 이태준 선생. [ AI 유사 생성 이미지]](https://santanews.cdn.presscon.ai/prod/140/images/20250815/1755216244518_754647871.jpeg)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국내외에서 의료와 독립운동을 함께 이어간 두 인물의 발자취가 주목받고 있다. 몽골에서 ‘슈바이처’로 불린 이태준 선생과, 광주 최초의 여의사 현덕신 선생이다.
몽골에서 펼친 인술과 항일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이태준 선생은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으로, 의사로 활동하던 중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몽골로 향한 그는 1914년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을 설립해 진료를 시작했다.
당시 몽골에 만연했던 매독을 치료하며 명성을 얻었고, 그 공로로 몽골 마지막 황제의 어의로 활동했다.
의술로 얻은 신뢰는 독립운동에도 큰 힘이 됐다. 그는 임시정부 군의관과 독립운동 자금 감무를 맡아 활동하며, 김규식 선생의 파리강화회의 참가를 위해 2,000원(현 6,000만 원 상당)을 지원했다.
또한 소비에트 정부가 임시정부에 지원한 자금 중 일부를 안전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무장투쟁에도 깊이 관여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폭탄 제조 기술자를 소개하고, 관련 자금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38세에 순국했다. 그의 노력은 훗날 김상옥·나석주 의사의 의거에 밑거름이 됐다. 이태준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여성의사로서의 사회적 책무
![1921년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현덕신 선생이다. [AI 생성 이미지]](https://santanews.cdn.presscon.ai/prod/140/images/20250815/1755216258420_213511261.jpeg)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2·8독립선언에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이던 현덕신 선생도 있었다. 이후 1921년 졸업해 당시 세 번째 한국인 여성 의사가 된 그는 귀국 후 조선총독부의원, 동대문부인병원 등에서 활동했다.
광주로 내려간 현 선생은 현덕신병원을 열어 여성·아동 진료를 이어갔으며, 근우회 광주지회 설립과 만주 조난 동포 구호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당시 사회 통념을 깨고 단발을 한 것도, 진료와 독립운동을 병행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의 외손자 최영훈 전 조선대 미대 학장은 “외할머니는 의료 활동과 여성 계몽, 구호 활동을 모두 아우른 인물”이라며 “광주 여성 독립운동사의 한 축을 세운 분”이라고 회상했다. 현덕신 선생은 2020년 건국포장을 수훈했다.
인류애로 확장된 독립운동
![광주 최초의 여의사인 현덕신 선생이 현덕신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 [AI 생성 이미지]](https://santanews.cdn.presscon.ai/prod/140/images/20250815/1755216272025_959666699.jpeg)
이태준 선생과 현덕신 선생의 활동은 항일투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 의료와 교육, 구호 활동은 독립운동을 인류애로 확장시킨 사례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삶이 “총과 폭탄만이 아닌, 인술과 봉사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