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천리 머나먼 길
조선시대 영남과 호남의 선비들은 천리길 한양으로 모여 들어 과거를 보았습니다.
초시(初試) 또는 향시(鄕試)는 각 지방에서 보고, 합격하면
복시(覆試)나 전시(殿試, 임금님 앞에서 보는 과거)를 한양에서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천리길(400km 가량, 경부고속도로 428km) 한양은 8도 중 남도 백성들이 그리던 염원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Korean Capital City 서울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젊은 유커(중국 관광객)들의 바퀴 달린 트렁크 행렬이 서울의 북촌과 서촌을 누빕니다.
북촌의 한옥과 세종대로 변 고층빌딩 및 광화문 궁궐이 어울려 펼치는
고금 문화(古今文化)의 매력이 그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한양과 수도 서울 곳곳의 명칭의 유래와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한양은 왕십리로부터 시작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전설과 예언의 궁합이 빚어낸 이름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는 새로운 수도 터전을 찾기 위하여 지금의 왕십리 주변 땅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계룡산 아래 신도안(新都內)으로 천도(遷都) 하려던 계획은 풍수지리학적인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1392년 개경에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기운이 짙게 배어 있고 옛 귀족 세력의 근거지인 개경을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태조 2년(1393년) 직접 대신들과 계룡산 자락 신도안을 살펴본 이성계는
단박에 신도안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공사가 10개월쯤 진행되었을 때 풍수지리학의 대가로서 경기 좌도 관찰사였던
하륜(河崙)이 신도안 도읍지를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신도안은 큰 물길이 없어서 일국의 도읍지로는 부적합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수도에는 8도의 조세 세곡을 수운으로 거둬 들여야 하는데
큰 강이 없으면 육로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정의 여론이 신도안 반대로 기울자 다시 수도 후보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연을 가진 무학대사의 발길이 당시 남경(고려의 4경 개경, 동경, 서경 및 남경)의 왕십리에 이른 것입니다.
그 곳 중 한군데에 나침반을 돌리고 있으니 소를 몰고가는 어떤 노인이
*십리를 더 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십리를 더 가라는 글귀가 왕십리(往十里) 지명이 되었습니다.
왕십리로부터 십리 거리는 지금의 경복궁 앞 세종로 지경입니다.
새 궁궐이 앉을 방향을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습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뒷산)으로 오른쪽 우백호에 목멱산(남산),
왼쪽 좌청룡에 북악산을 두어 동향으로 궁궐 방향을 주장했습니다.
한양의 거친 산세와 기운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으며, 나라가 평안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에 낙산, 우백호에 인왕산을 주장했습니다.
제왕은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천하를 호령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정도전이 이겨서 경복궁이 남향으로 들어 앉게 되었습니다.
무학대사는 이 곳은 지력이 약하여 200년이 지나면 큰 난리가 날 것이라고 예언 하였습니다.
그 예언이 적중했는지 조선 건국 200년 후이 1592년에 임진왜란이 터진 것입니다.
남향 궁궐터를 정하고서 실제로 터 파기 공사를 하려니 북악산 뒤 삼각산 꼭대기가 넘어다 보는 형상 이었습니다.
그 형상을 피하기 위하여 북악산 쪽으로 바짝 당기다 보니, 경복궁 뒤는 공백이 빈약한 북악산 자락이 되었습니다. 왕성 궁궐은 사방이 광활 해야 그 권위가 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경복궁 뒤 현 청와대 터는 고려시대 이궁(离宮, 별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남경으로 불린 그 곳에는 왕기(王氣)가 서린다는 도참설(圖讖說)이 나돌았습니다.
십팔자왕설(十八子王說) 도참설 인데, 십팔자는 이(李)의 파자 입니다.
남경 벌리에 오얏(자두)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일정 수준으로 자라면 베어버려 이씨 왕기를 꺾었다는 이야기가, 서거정의 필원잡기나 이중환의 택리지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 오얏나무를 심고 베었다는 지명 벌리는 오늘날 번동(樊洞) 입니다.
벌리(伐李)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서울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 졌을까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순수 우리말 입니다. 그 유래는 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은 *새로운 땅 또는 도읍지*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서라벌이 *서라벌→ 셔블→ 서울*로 변하면서 오늘날 서울이 된 것입니다.
서울은 역사 속 다른 이름들이 있습니다. 백제 시대는 최초의 수도로서
하남 위례성 이라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는 남경이라 불렸습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은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한성부(漢城府)라고도 불렸습니다.
수도를 관통하는 한양은 세계에서 가장 맑은 물이 흐릅니다.
영국 런던의 테임즈 강이나 프랑스 파리의 세느강은 한강보다 흐린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한강의 맑고 넓으며 깊은 물 삼천리 금수강산의 대표적 풍경입니다.
한양의 동별 지명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곳이 많습니다.
묵정동(墨井洞)은 먹물 우물 골목이라는 뜻입니다.
이 동네에 있던 우물물이 유독 검어서 먹정우물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이곳에는 서적을 인쇄하는데 사용하는 먹물을 많이 사용하던 관청인 주자소가 있었습니다.
회현동(會賢洞)은 어질고 현명한 사람들이 모이던 동네입니다.
정릉동(貞陵洞)은 태조 이성계의 사랑하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정릉)이 있는 것입니다.
원래 정동(덕수궁 근처)에 있었으나 계모를 미워했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지금의 정릉동으로 강제 이전한 것입니다.
안국동(安國洞)은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보살핀다(輔國安民)는 염원을 담은 안국방에서 유래했습니다.
마장동(馬場洞)은 왕실에서 직접 운영하던 말목장이 있던 곳입니다.
압구정(狎鷗亭)은 수양대군을 도와서 계유정난 시에 생살부(生殺簿)로 권력의 백정 노릇을 했던 한명회의 정자가 있던 곳입니다.
수양대군 시대가 저문 후 지방으로 낙향하라던 한양 인심에 대한 미봉책으로,
겨우 한강 건너 언덕에 달랑 정자를 하나 지어놓고 갈매기와 벗하며 살겠다고 하던 것입니다.
역대로 홍수가 지면 물이 많이 들던 압구정동이 북한강 소양댐을 지은 후에
서울의 강남 최고의 주택지가 된 것입니다.
망원동에는 망원정이 있었습니다. 양령대군이 세자에서 물러나자
세종대왕의 둘째인 효령대군이 왕세자가 될 것이라고 기뻐하자,
형인 양녕대군이 *너가 아니고 셋째 충령(세종)이라*고 귀띔을 해주자
이곳에 희우정을 지어놓고 한강물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세종대왕께서 한번 들러 셨는데 마침 그날 반가운 비가 내려서 희우정(喜雨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망원정(望遠亭)으로 이름을 고쳐서 먼 곳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정자라고 했습니다.
망원동 인근 합정동에는 절두산(截頭山) 추모비 유적이 있습니다.
조선 말기 대원군 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 시에 목을 잘라 처형하던 곳입니다.
병인양요 시에 불란서 군대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기선을 정박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대원군이 그곳에 피를 흘려서 원한을 갚고자 했다던 곳입니다.
노랑진 노들강변의 노들은 세조가 사육신을 처형 하던 곳입니다.
단종을 복위하려던 거사가 한 동지의 밀고로 발각되어,
거열형(소가 끄는 수레로 육신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집행하던 장소 입니다.
조선 최고의 충렬 성삼문(成三問)의 절명시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하는 애절한 장소 입니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둥둥 치는 북소리는 사람 목숨을 재촉하는데)
회수일욕사(回首日欲斜,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해는 서산으로 지려 하는구나)
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 황천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는데)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오늘밤에는 뉘 집에서 자고 갈거나)
서울에는 일제시대 인위적으로 만든 지명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일제의 여러 만행 중 하나 입니다.
그 의도가 참으로 야만적인 창씨개명(創氏改名) 과정에서 지명도 바꾼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명동(明洞) 입니다.
그들의 명치천황(明治天黃)의 앞 글자를 따와서 명치정이라고 불렀던 것이 명동으로 바뀐 것입니다. 인사동 등 그 외에도 여러 곳이 있습니다.
이제 수도 서울은 인구가 집중되어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랐습니다.
의식주(衣食住) 중에서 유독 집값이 이웃 사촌 인정을 메마르게 하는 중입니다.
정부의 주택 정책은 발표하기만 하면 집값이 오릅니다. 집 지을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수도로 집중되다 보니 집값이 오르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 입니다.
집 지을 터는 얼마 찾지 못하고 세금과 금융 정책만으로 집값을 잡으려고 하니,
정부의 주택정책 발표 시 마다 집값이 오르는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땅을 먼저 마련해야 합니다. 서울이 만원이면 서울 인접 땅으로 넓혀 나가야 합니다.
그곳에 서울 도심과 대등하게 교통을 원활하게 하고 주택 부대시설(인프라)을 갖추며,
소형 규모부터 중형 규모의 아파트를 고루 지어야 합니다.
자가 및 임대주택을 병행해야 합니다.
부자들의 기호에만 맞출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형편에 맞는 집도 동시에 지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울이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옥철 전철이 아니라 수도 서울을 골고루 오가는 지하철, 광역 철도, 2층 버스 등이 어우러진 교통망을 먼저 구축한 후에 주택을 지어 나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