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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정돈, 비움의 미학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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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버려야 새 것이 들어온다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채움이다.


 

정리정돈, 일단 버려야 새것이 들어온다

 

넘쳐나는 시대에 다시 주목받는 ‘비움의 미학’


 

옷장은 가득 차 있지만 입을 옷은 없고, 서랍은 넘치는데 필요한 물건은 늘 찾기 어렵다. 

물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생기는 역설이다. 최근 정리정돈과 미니멀 라이프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생활 철학으로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비움은 선택의 포기이자 동시에 삶의 질을 높이는 적극적 행위’라고 말한다.


 

집 안 풍경에서 드러나는 과잉의 일상

 

서울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모(38) 씨는 지난 연말 대대적인 집 정리를 했다. ‘10년 넘게 안 입은 옷, 언젠가 쓸 것 같아 모아둔 전자제품 박스들이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막상 버리고 나니 집이 넓어졌다는 느낌보다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김 씨는 이후 충동구매가 줄고, 필요한 물건을 고를 때도 더 신중해졌다고 말한다.


주부 이모(45) 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주방 정리를 하다 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가 한가득이더라고요. 정리 후에는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한눈에 보이고, 음식물 쓰레기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비움은 ‘버림’이 아니라 ‘선별’


전문가들은 정리정돈의 핵심을 단순한 청소가 아닌 선별의 과정으로 본다. 정리 컨설턴트 박모 씨는 ‘정리는 무엇을 버릴지보다 무엇을 남길지를 결정하는 행위’라며  ‘자주 쓰는 것,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만 남기면 공간과 시간 모두 효율적으로 바뀐다’고 설명한다.


특히 언젠가 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물건을 쌓아두는 습관은 삶의 피로도를 높이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박 씨는 ‘미래의 불안을 물건으로 대비하려는 심리가 쌓일수록 공간은 숨 막히고, 결정 피로도는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마음 건강과도 맞닿은 정리정돈

 

정리정돈은 정신 건강과도 밀접하다. 심리 상담가들은 어질러진 공간이 집중력 저하와 불안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상담 현장에서  ‘집이 어수선할수록 머릿속도 복잡하다’는 호소는 흔하다. 상담 전문가 정모 씨는 ‘정리는 통제감을 회복하는 작은 실천’이라며 스스로 선택하고 정리한 공간은 안정감과 자기 효능감을 높여준다고 분석했다.


 

소비 습관까지 바꾸는 힘


비움의 미학은 소비 태도에도 변화를 준다. 필요 이상의 물건을 들이지 않게 되면서 사고 버리는 소비에서 고르고 오래 쓰는 소비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개인의 가계 관리뿐 아니라 환경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과잉 소비를 줄이는 작은 실천이 곧 자원 절약과 쓰레기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비움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채움

 

정리정돈은 단순히 집을 깨끗이 하는 일이 아니다. 불필요한 물건을 비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점검하게 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여유와 가능성이 들어온다. 전문가들은 ‘비워야만 새로운 것이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고 입을 모은다.


 

넘쳐나는 것들 사이에서 무엇을 내려놓을지 선택하는 일.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채움이다. 

오늘 하루, 서랍 하나를 여는 작은 실천이 내일의 삶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 수 있다.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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