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칠맛의 정수 ‘육젓’…여름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한 점의 예술
짭짤하면서도 깊은 감칠맛, 작은 새우 한 마리가 풍기는 강렬한 존재감. ‘새우젓’은 한국 밥상의 조연 같지만, 없어서는 안 될 재료다. 특히 해마다 여름철에만 잠시 만날 수 있는 ‘육젓’은 그중에서도 최고급으로 꼽힌다. 단순한 발효 식품을 넘어, 제철과 지역, 그리고 숙성의 미학이 더해진 전통의 정수다.

‘육젓’의 계절, 6월부터 8월까지…기다림이 만든 맛
육젓이란 음력 6월 무렵에 잡은 새우로 만든 새우젓을 말한다. 보통 6월~8월 사이에 채취된 신선한 새우가 그 재료다. 이 시기의 젓새우는 크고 단단하며, 감칠맛을 가장 잘 품고 있어 예로부터 최고급으로 대접받아 왔다. 그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잡은 직후 소금에 절여 최소 3개월간 숙성해야 한다. 이르면 9월, 진짜 육젓의 맛이 올라오는 시기다.
반면, 음력 5월경 잡히는 새우로 만든 오젓은 육젓보다 다소 작지만 감칠맛이 뛰어나고 숙성 시기도 앞선다. 오젓은 이른 여름부터 맛을 볼 수 있는 만큼, 지금이 가장 맛이 오르는 때다.
새우젓의 본고장, 전남 신안과 강화도
국내 새우젓의 주요 생산지는 전남 신안, 목포, 강화 등지다. 특히 전남 서남해안은 새우젓의 주산지로, 매년 경매 시즌이 되면 수백 개의 드럼통이 수산시장에 늘어선다. 드럼통 하나에 담긴 새우젓은 약 250kg. 한 드럼의 가격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단 몇 시간 사이에 그해 최고의 새우젓이 결정된다.
같은 시기, 같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새우라도 숙성의 정도, 소금의 양, 잡힌 위치에 따라 품질 차이가 확연하다. 젓새우는 배 위에서 바로 소금에 절이기 때문에 선장의 기술과 감각도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보통 새우:소금의 비율은 75:25 정도가 이상적이다.
숙성이 좌우하는 ‘맛의 정점’…광천 토굴의 전설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에는 특이한 숙성 방식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광산으로 쓰이던 토굴을 새우젓 숙성 창고로 활용한 것. 이곳은 연중 15~17℃의 일정한 온도와 80%에 이르는 높은 습도를 유지해, 새우젓 발효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광천 토굴 새우젓’은 이로 인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2024년에는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광천 일대에는 40여 개의 토굴이 남아 있으며, 이 중 ‘중앙토굴’은 그중에서도 위생 상태와 발효 환경이 우수하다고 평가받는다. 소비자가 직접 방문해 숙성 중인 새우젓을 맛보고 구매할 수 있는 점도 특별하다. 토굴을 방문하면 “이 굴에서라면 무엇이든 맛있게 익겠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새우젓, 단순한 조미료 아닌 한국 밥상의 자산
좋은 새우젓은 맛의 구조부터 다르다. 보통은 짠맛이 입안을 먼저 때리고, 뒤늦게 감칠맛이 잽처럼 들어온다. 반면 제대로 숙성된 새우젓은 감칠맛과 단맛이 짠맛과 동시에 퍼지며,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깊은 풍미를 남긴다. 특히 숙성 3개월 안팎의 제철 새우젓은 육질이 살아 있어, 씹었을 때 특유의 ‘톡톡’ 터지는 식감까지 선사한다.
물론 너무 오래 숙성되면 새우 단백질이 소금에 녹아 육질은 줄고 짠맛만 강해질 수 있다. 그래서 새우젓은 계절과 숙성 타이밍을 맞춰야 진가를 발휘한다. 요리의 감초이자 보이지 않는 중심축이 되는 이유다.
오젓이냐, 육젓이냐…당신의 선택은?
육젓은 오젓보다 약 20~30% 정도 크고, 가격은 두 배 가까이 비싸다. 하지만 크기와 가격만으로 선택하기엔 이 둘의 매력은 각기 다르다. 톡톡 터지는 식감을 좋아한다면 지금이 제철인 오젓이 더 어울릴 수 있다. 반면 깊고 묵직한 감칠맛과 최고급 풍미를 원한다면 가을부터 만날 수 있는 육젓이 제격이다.
결국 새우젓은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바다와 시간, 땅이 함께 빚어낸 풍미의 예술이다. 올해 여름, 냉장고 한편에 좋은 새우젓 한 통을 들여놓는다면 그 자체로 한 끼가 풍성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