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문과 전문직이 무너지고 있다

“명함은 전문직인데 현실은 생계 전쟁”
— 무너지는 문과 전문직 청년들
개업 간판 뒤의 눈물
서울 서초동의 한 오피스텔. 변호사 김모(34) 씨는 최근 사무실을 정리하고 ‘사서함 등록’만 남겼다. 월 200만~300만원에 달하는 임차료를 더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공유오피스의 우편함 주소를 사업장 주소로 사용하며 카페와 회의실을 전전해 상담을 이어가고 있다. 김 씨는 “명함에는 변호사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생활비를 걱정하는 날이 더 많다”고 말했다.
한때 ‘고소득 전문직’의 상징이었던 변호사와 회계사의 현실이 급변하고 있다. 청년 전문직 상당수가 과잉 경쟁과 경기 침체 속에서 생존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일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배달 업무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일부는 업계 자체를 떠난다.
전문직이 더 이상 안정된 중산층의 상징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온다.
“250만원에 사건 맡습니다”
— 무너진 수임 시장
과거 변호사 시장은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임료가 유지됐다. 그러나 로스쿨 확대 이후 변호사 수가 급격히 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대한변호사협회 통계에 따르면 국내 변호사 수는 10여 년 사이 크게 증가했다. 문제는 시장 확대 속도가 공급 증가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청년 변호사들이 몰리는 형사·민사 사건 시장에서는 ‘출혈 경쟁’이 심화됐다. 과거 수백만 원 이상 받던 사건을 250만원 안팎에 맡는 사례도 흔해졌다. 인터넷 광고와 플랫폼 경쟁까지 겹치며 사실상 가격 덤핑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서울에서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는 한 청년 변호사는 “사건을 안 받으면 생존이 어렵고, 낮은 가격에라도 맡으면 노동 강도만 높아진다”며 “수임료는 줄었는데 서류 작업과 책임 부담은 오히려 더 커졌다”고 토로했다.
실제 일부 신입 변호사들은 월 순수익이 최저임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무실 운영비와 광고비, 각종 협회 비용을 제외하면 남는 돈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회계사도 예외 아니다
— 편의점 야간 알바 뛰는 현실
회계업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형 회계법인 입사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지만 중소 회계법인이나 개인 사무소의 현실은 냉혹하다.
한 공인회계사 박모(31) 씨는 낮에는 세무 기장을 하고 밤에는 편의점 야간 근무를 한다. 그는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대출 이자와 월세를 내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회계사 증가와 함께 AI 기반 자동 회계 시스템이 빠르게 도입되면서 단순 기장 업무의 수익성도 크게 낮아졌다. 과거 사람 손으로 처리하던 업무 상당수가 자동화되며 중소 사무실의 수익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경기 침체까지 겹쳤다. 자영업 폐업 증가로 거래처가 줄고, 기업들 역시 비용 절감을 위해 외부 회계 서비스를 최소화하는 분위기다. 전문직 공급은 늘었지만 시장은 오히려 쪼그라드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왜 문과 전문직은 흔들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개인 실패가 아니라 산업 구조 변화의 결과라고 분석한다.
첫 번째 원인은 ‘공급 과잉’이다. 로스쿨 확대와 자격시험 합격자 증가로 전문직 숫자가 급증했지만 시장 수요는 제한적이다.
두 번째는 플랫폼 경제의 확산이다. 법률·세무 서비스마저 온라인 가격 비교 구조에 들어가면서 전문성보다 ‘최저가 경쟁’이 우선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비용 절감 효과가 있지만, 청년 전문직에게는 생존 압박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는 문과 직군 전반의 구조적 약세다. AI와 자동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단순 문서 작성이나 기장 업무의 가치가 감소하고 있다. 기업들도 과거처럼 전문직 인력을 대거 채용하지 않는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과거 전문직은 희소성이 보장된 안정 직업이었지만 지금은 시장 논리에 그대로 노출된 프리랜서형 직업으로 변하고 있다”며 “청년층의 사회적 불안정성이 전문직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무너지는 청년 전문직, 사회 신뢰도 흔든다
문제는 이 현상이 단순히 개인의 경제난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계 압박이 심해질수록 일부 전문직 종사자들은 과도한 사건 수임이나 무리한 영업 경쟁에 내몰릴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결국 서비스 질 저하와 사회적 신뢰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지나친 경쟁은 청년층의 좌절감도 키운다. 수년간의 시험 준비와 막대한 교육비를 감당하고도 생계 불안을 겪는 현실은 청년 세대 전체에 허탈감을 안긴다.
숫자 늘리기보다 생태계 재편 필요
전문가들은 단순히 자격자 수를 조절하는 수준을 넘어 전문직 시장 구조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청년 전문직에 대한 공공 영역 진출 확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지방 중소도시의 법률·회계 서비스 공백을 메우는 공공 지원형 모델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또 AI 시대에 맞는 전문성 재교육도 중요하다. 단순 서류 업무 대신 기업 자문, 국제 분쟁, 디지털 세무, 데이터 분석 같은 고부가가치 영역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전문직이면 평생 안정된다”는 사회적 환상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제 청년 전문직은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불안정 노동 현실을 함께 겪는 또 다른 청년층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