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산책

역사는 우연이 아니라 진보의 궤적인가
칸트의 역사철학, 인문학적 시각에서 다시 읽다
역사는 반복되는 혼란의 기록일까, 아니면 인간 이성이 조금씩 전진해 온 흔적일까.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전쟁과 갈등, 실패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를 단순한 우연의 연쇄가 아니라,
이성이 스스로를 실현해 가는 장기적 과정으로 이해했다.
오늘날 불확실성과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칸트의 역사철학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칸트의 역사관은 1784년 발표한 「보편사적 관점에서 본 세계시민적 역사 구상」에 집약돼 있다. 그는 개별 인간의 삶은 혼란스럽고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는 일정한 목적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 목적은 다름 아닌 인간 이성의 발전과 자유의 확대다. 칸트에게 역사는 신의 섭리나 운명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이성의 잠재력이 사회와 제도를 통해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장이었다.
특히 주목할 개념은 ‘비사회적 사회성’이다. 인간은 타인과 협력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경쟁하고 갈등하는 비사회적 충동을 지닌다.
칸트는 이 긴장이야말로 문명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라고 보았다. 개인의 이기심과 경쟁이 법과 제도를 낳고, 그 제도 속에서 인간은 더 큰 자유와 합리성을 학습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시장 경쟁, 민주주의의 갈등 구조 역시 이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칸트 역사철학의 궁극적 지향은 세계시민적 질서다. 그는 전쟁을 역사 발전의 필연적 통과의례로 정당화하지 않으면서도, 전쟁의 비극이 인간으로 하여금 평화의 제도를 고민하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국제법, 공화국 체제, 시민의 권리 확대는 우연히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학습의 결과라는 해석이다. 이는 현대 인권 담론과 국제기구의 철학적 토대와도 맞닿아 있다.
물론 칸트의 역사관은 비판도 받는다.
유럽 중심적 시각,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는 식민주의와 결합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예언이 아니라 질문 방식이다.
인류는 더 나아질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제도를 통해 자유를 확장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후 위기, 전쟁, 기술 불평등이 공존하는 21세기에도 칸트는 단순한 낙관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미성숙함과 갈등을 직시하면서도, 이성이 포기되지 않는 한 역사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역사철학은 그래서 오늘날에도 하나의 희망이자 책임의 철학으로 남아 있다.
역사가 진보할지 여부는 예정된 결말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