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대 자서전 쓰기

내 삶이 책이 되는 순간
60~70대 자서전 쓰기, 고립감 완화와 자존감 회복의 생활형 복지로 떠오르다
서울 강북구의 한 평생학습 강의실. 여름부터 매주 글을 써온 어르신 17명이 각자 표지를 고르고 마지막 교정지를 넘긴다. 프로그램 제목은 ‘ChatGPT와 함께 쓰는 인생 이야기’. 참여자들은 약 두 달간의 수업과 한 달간의 편집을 거쳐 한 권씩 자신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한평생 살아온 이야기가 책으로 남게 되어 꿈만 같다는 소감이 이어졌다. 지역 평생학습센터가 주관하고 대학 교수진이 감수했으며, 인공지능 도구를 보조로 활용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처럼 ‘어르신 자서전 쓰기’가 각 지자체·복지관의 정례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으며, 은퇴세대의 고립감을 덜고 자존감을 높이는 생활형 복지 모델로 확산하고 있다.
왜 지금 ‘자서전’인가, 고립·우울 리스크와 지역의 대응
고령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홀로 고립되는 위험은 통계로 확인된다. 보건복지부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23년 고독사 사망자는 3,661명으로, 전체 사망자 100명당 1.04명 수준이다. 정책적 대응이 이어지고 있으나, 지역 현장에서의 관계 회복과 말 걸기 해법이 절실하다는 점을 수치가 상기시킨다.
자서전 쓰기는 그 공백을 메우는 비교적 간단한 개입이다. 한 연구는 6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15회기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시행한 결과 자아통합감·생활만족도·삶의 질이 향상되고 우울감이 감소했다는 사전·사후 변화가 확인됐다고 보고한다.
또 다른 연구는 자서전적 기억 기능이 노년층의 회복탄력성과 유의한 상관이 있음을 제시하며, 회고·정리·의미부여 활동이 건강한 적응에 기여할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즉, 과거를 서사로 조직해 나를 다시 보는 행위가 정서적 안정과 대인관계 회복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장의 지도 - 지자체·복지관·평생학습의 삼각 협업
지방자치단체와 복지기관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자서전 수업을 꾸려왔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캠퍼스·센터를 통해 4주(총 8시간) 과정의 자서전 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출판 기념 행사까지 연계해 가족·이웃의 축하 속에 완성의 경험을 제공했다.
단기간·소규모·완주 중심의 과정 설계를 통해 진입 장벽을 낮춘 점이 특징이다.
복지관 주도의 세대 통합형 모델도 눈에 띈다. 서울 강서구 등촌7종합사회복지관의 ‘노인의 품격’은 60세 이상 어르신과 청소년·자원봉사자가 짝을 이뤄 인터뷰→원고화→교정→소책자 출간까지 이어지는 멘토–멘티 동행형 프로그램이다. 2024년에 이어 2025년에도 매주 토요일 정기 과정으로 운영되며, 참여 문턱을 낮춰 ‘누구나 자기 삶의 기록자’가 되도록 돕는다. 주기적 만남과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관계망을 넓히는 구조다.
한편 강북구 평생학습센터는 2025년 여름, ‘AI 보조 글쓰기’ 방식을 도입해 단기간에 초고를 완성하고 전문가 감수로 완성도를 높였다. 디지털 도구의 보조는 손이 느린 어르신에게 속도·정리·교정 측면의 지원을 제공하고, 강사는 구술·사진·기억 지도(memory map) 등 아날로그 기법으로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식으로 혼합형 수업을 운영했다. 결과적으로 17권의 개별 자서전이 출간됐다.
무엇이 달라지나 - 고립감 완화→자존감 회복→지역 연결
현장의 변화는 세 가지 층위에서 관찰된다.
1. 정서적 안정과 자기인식의 확장
생애사를 문장으로 붙잡는 과정은 ‘내가 살아낸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다. 연구에서 확인된 자아통합감 상승과 우울감 저하는, 한 챕터씩 완성할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자각이 커지는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다. 강의실에서는 ‘이제는 내 이야기를 꺼낼 자격이 생겼다‘는 표현이 흔하다.
2. 관계 재구성, 세대 간 상호작용의 복원
인터뷰 기반 프로그램은 가족·이웃·청년 자원봉사자와의 경청–공감–기록 루틴을 만든다. 질문지를 중심으로 매주 만나는 사이, 참여자는 자연스레 말할 상대와 기다림의 약속을 갖게 된다. 이는 독거·은둔의 루틴을 흔들어 고립감을 실질적으로 낮춘다. (등촌7 복지관의 세대통합형 모델은 이 구조를 제도화했다.)
3. 지역 커뮤니티의 기억 인프라 축적
완성된 소책자·전시·출판기념회는 동네 도서관·주민센터에 ‘살아있는 구술사(oral history)’ 자원을 남긴다. 강북문화정보도서관은 웰다잉 관점의 맞춤형 자서전 과정을 예고하며, 지역의 삶과 기록을 연결하는 플랫폼을 확대 중이다.
일회성 강의를 넘어 ‘생활형 루틴’으로
확산 흐름에도 개선점은 분명하다.
첫째, 지속성 : 시즌제·단기 강좌는 완주율이 높지만, 관계가 끊기면 효과가 줄어든다. 동아리–후속집필–낭독회로 이어지는 연중 루틴 설계가 필요하다.
둘째, 접근성 : 디지털 기기 미숙, 시력·손떨림 등 노년의 신체적 제약을 고려해 구술·녹취 자동 전사–원고 정리–교정 낭독의 다중 경로를 기본 옵션으로 둬야 한다.
셋째, 전문성 : 글쓰기 강사에게는 노년 심리·상실 애도·기억 자극법(사진·지도·사물 회상) 교육을 병행하고, 지역 대학·문학관·보건소와의 자원 연계를 시스템화해야 한다.
정책·현장 제안, ‘자서전 쓰기’표준 모델 5단계
1. 발굴–동기화: 경로당·복지관·의원·치매안심센터 연계로 관심자 사전 발굴, 오리엔테이션에서 소책자 샘플을 보여 완주 동기 부여.
2. 기록–정리: ‘10문장 심화 질문지’(출생·일·사람·상실·배움·보람·후회·감사·바람·한마디)를 주차별로 진행. 사진·물건·지도 등 ‘기억 도구’를 활용.
3. 디지털 보조: 음성 녹취→자동 전사→맞춤 교정. 문해력 부담이 큰 참여자는 구술-필사-낭독 콤보로 전환.
4. 출간–공유: 가족·이웃이 참여하는 낭독회·전시회를 표준화. 지역 도서관 한 코너를 ‘동네 자서전 서가’로 지정. (여기엔 서울시50플러스의 단기 완주 모델과 강서구·강북구의 세대통합·AI 보조 사례를 참조.)
5. 사후 루틴: 후속 동아리–마을신문 기고–구술사 인터뷰 봉사로 기록이 관계가 되는 선순환을 설계.
비용–효과, 작지만 확실한 복지
예산 측면에서도 자서전 쓰기는 합리적이다. 강사비·교재·인쇄비 중심의 소액으로 정서적 안정·자존감 회복·지역 네트워크 확대라는 다층 효과를 낸다.
특히 고독사 예방의 관점에서 정기적 만남과 약속이 안전망 역할을 한다.
지자체는 문화예술·평생학습·복지 예산을 통합해 연 2회 상·하반기 표준 과정을 운영하고, 지역 기업의 사회공헌(CSR)과 연계한 출판·전시 후원을 묶으면 지속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멋진 현장을 찾아서
1. 세대 통합형: 등촌7종합사회복지관 ‘노인의 품격’—어르신과 청소년이 짝을 이뤄 인터뷰·원고화·출간까지 동행. 2024~2025년 매주 토요일 정기 운영.
2. 디지털 보조형: 강북구 평생학습센터—AI 도구와 전문가 감수 병행, 17명의 자서전 출간.
3. 단기 완주형: 서울시50플러스—4주 8시간 과정, 출판 기념 행사 연계로 ‘완성 경험’ 극대화.
4. 전시·공유형: 복지관 ‘인생樂서교실’—완성작 전시로 마을과 성과 공유.
향후 전망 - ‘나의 서사’가 지역의 자산이 될 때
최근 언론은 자서전 쓰기가 유명인의 전유물을 넘어 노인 복지의 뉴트렌드가 됐다고 짚는다. 핵심은 결과물 그 자체보다, 쓰는 동안 매주 누군가를 만나고,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고립을 줄이고 자존을 세우는 이 작은 의식이, 동네 도서관의 한 칸을 채우고, 손주 세대의 질문을 불러오며, 마을의 기억을 단단히 쌓아 올린다. 결국 ‘내 삶이 책이 되는 순간‘은 개인의 치유를 넘어, 지역 공동체가 서로의 이야기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출발점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