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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2세의 눈에 비친 ‘세 개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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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2세의 눈에 비친 ‘세 개의 한국’

산타뉴스 이성로기자
입력
광복 80주년 특별전서 1951년 회고록 첫 공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목사 [사진제공  위키백과]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목사 [사진제공 위키백과]

서울 중구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특별전을 열고,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2세(헨리 도지 아펜젤러·1889∼1953)가 남긴 회고록 "내가 겪은 세 개의 한국"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글은 1951년 부산에서 작성된 것으로, 구한말·일제강점기·해방 이후 한국의 모습을 생생히 담아낸 역사 자료다.
 

선교사 가문의 유년기와 교육 활동

 

도지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1900년 일시적으로 미국에 돌아갔으나 17년 뒤 다시 한국을 찾았고, 선교 활동과 함께 아버지가 세운 학교 교장으로 20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920년 3·1운동 1주년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문제가 되어, 일제 당국으로부터 “교장의 도덕성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고 학교에서 쫓겨나는 아픔도 겪었다.
 

아펜젤러는 회고록에서 1910년 병합 이후 일제강점기, ‘도살자’ 총독의 폭력 통치 기록으로 한국의 주권 상실을 뼈아프게 적었다. 

1917년 부산 부두에서 일본인이 한국 노동자를 발로 차던 장면을 “굴욕의 첫인상”으로 남겼으며, 이후 더 큰 폭력과 차별을 직접 목격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1916∼1919년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대해 “별명 그대로 ‘도살자’처럼 행동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일본 당국이 민간인을 선동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총검으로 찔렀다고 증언하면서, 일제 통치의 본질은 “제국이 먼저, 조선인은 그다음”이었다고 비판했다.
 

해방 이후와 6·25 전쟁의 혼란

 

광복 후 한국을 다시 찾은 그는 해방 정국의 복잡한 현실과 미군정, 그리고 남북 분단의 현실을 목격했다. 

1946년 잠시 귀국했을 때는 조선총독부 건물(의사당) 앞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걸린 장면을 인상 깊게 기록했다.

또한 그는 6·25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해서도 “북한이 남한의 발전 속도를 두려워해 공격을 서둘렀다”는 개인적 해석을 남겼다.
 

“세 개의 한국”을 기록한 역사적 증언

 

아펜젤러는 어린 시절의 한국을 “진정한 한국인의 나라”라 묘사하며 상투와 갓을 쓴 풍경, 철도 개통 당시의 기억 등을 세세히 적었다. 

해방 후 한국은 “모순과 혼란이 뒤섞여 요동치는 덩어리”였다고 평가하면서도, 끝맺음은 종교적 신념을 드러내는 성경 구절로 마무리했다.
 

전시의 의미

 

이번에 공개된 글은 2008년 이후 보관돼 오다 최근 조사·연구를 거쳐 빛을 보게 됐다.

가족들의 기증으로 박물관에 보관된 자료이며, 영문으로 작성된 글을 가족들이 1991년 편집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종헌 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은 “아펜젤러 2세는 세 시기의 한국을 직접 경험한 인물로, 그의 기록은 곧 살아 있는 역사”라며 전시 의의를 강조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아펜젤러의 회고록 외에도 배재학당의 교육 활동 기록,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 관련 문서, 「배재환갑」 등의 자료가 함께 전시되며, 내년 8월 14일까지 이어진다.
 

이성로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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