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첫번째 크리스마스

1896년 12월 25일,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의 행사가 열렸다. 서울 정동 일대의 교회와 학교에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과 초기 신자, 학생들이 모여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린 것이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행사다. 오늘날 화려한 장식과 연말 축제로 자리 잡은 크리스마스는, 당시만 해도 매우 조용하고 제한적인 종교 행사였다.
선교사들의 예배로 시작된 한국의 성탄절

당시 크리스마스 행사는 헨리 아펜젤러, 호러스 언더우드 등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심이 돼 치러졌다. 장소는 정동제일교회와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 특히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등이었다. 예배에서는 예수 탄생 이야기를 읽고, 막 번역되기 시작한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사탕이나 과일 같은 소박한 선물이 오갔지만, 트리나 산타클로스 같은 상징은 거의 없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초상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퍼블릭 도메인]](https://santanews.cdn.presscon.ai/prod/140/images/20251217/1765972277241_4489268.jpg)
조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봤을까
당시 조선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서양 종교의 낯선 의식’에 가까웠다. 유교적 제례와 불교 행사가 생활의 중심이던 사회에서, 특정 날짜를 정해 노래를 부르고 예배를 드리는 풍경은 생소했다. 일부는 서양 문물의 하나로 호기심을 보였고, 일부는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를 통해 젊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성탄절은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는 축제라기보다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스며드는 통로’에 가까웠다.
천주교의 성탄절은 더 빨랐을까
한국에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18세기 말 이미 신앙 공동체가 형성돼 있었고, 성탄절 역시 교회력에 따라 기념됐다. 다만 박해 시기에는 공개적인 성탄 행사가 거의 불가능했다. 소규모 신자들이 비밀리에 미사를 드리는 수준이었고, 사회적으로 ‘행사’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공개 성탄 행사는 1896년 개신교 선교사들의 크리스마스가 가장 이른 사례로 꼽힌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언제부터 퍼졌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영어 인사가 알려졌고, 해방 이후 미군 주둔과 함께 서구식 크리스마스 문화가 빠르게 퍼졌다. 1950~60년대에 들어서면서 카드, 캐럴, 장식 문화가 자리 잡았고, 1949년 성탄절이 공식 공휴일로 지정되며 크리스마스는 종교를 넘어 사회적 기념일이 됐다.
조용한 예배에서 모두의 연말로
한국의 첫 크리스마스는 화려하지도, 널리 알려지지도 않은 작은 예배였다. 하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성탄절은 학교를 통해, 교회를 통해, 그리고 일상의 인사말을 통해 조금씩 확장됐다. 처음엔 낯설었던 서양의 종교 의식은 시간이 흐르며 연말의 안부를 묻는 날이 됐고, 나눔과 휴식의 의미를 더해갔다.
추위와 불안이 일상이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고, 작은 선물을 건넸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조용히 시작돼, 세대를 거치며 모두의 하루로 자리 잡았다.
값비싼 선물이 아니어도 괜찮다. 정성이 깃든 작은 선물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 그 소박한 기쁨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