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사의 사자상

빈사의 사자와 기본소득 - 스위스가 선택한 책임의 윤리
2016년 6월, 스위스 국민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국민투표에서 성인에게 매달 약 2,500스위스프랑(한화 약 300만 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안을 압도적 반대로 부결시켰다.
복지 선진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나라가 ‘공짜 소득’을 거부한 결정은 의외로 보였지만,
그 선택의 뿌리는 스위스의 역사적 기억과 국민성에 깊이 닿아 있다.
그 단서 가운데 하나가 루체른에 서 있는 ‘빈사의 사자상’이다.
이 조각은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튈르리 궁을 지키다 전사한 스위스 근위병들을 추모한다.
창에 찔린 채 방패를 끌어안고 쓰러지는 사자의 표정은 장엄한 비극을 넘어, 맡은 책무를 끝까지 감당하는 충성·책임의 상징으로 읽힌다.
스위스는 이 사자를 ‘패배한 영웅’이 아니라 ‘의무를 다한 시민’의 표상으로 기억해왔다.
기본소득 논쟁에서도 이 윤리는 반복됐다.
찬성론은 자동화 시대의 안전망을 강조했지만, 다수의 유권자는 노동과 사회 기여의 연계를 느슨하게 만드는 제도가 공동체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복지는 필요하되, 책임 없는 권리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직접민주주의의 전통 속에서 재정 건전성, 자치의 자율성, 노동의 존엄을 함께 고려하는 태도는 ‘빈사의 사자’가 품은 침묵의 메시지와 닮아 있다.
스위스의 선택은 복지를 부정한 결정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자립과 공동체의 책임을 동시에 지키려는 보수적 용기의 표현이다.
쓰러져도 방패를 놓지 않는 사자처럼, 스위스는 시대의 유혹 앞에서 스스로의 윤리를 지켜냈다. 기본소득을 거부한 그날의 투표는, 역사 속 조각이 오늘의 시민에게 말을 건넨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