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대등하게 맞섰던 고려의 수도 송도
한민족 역사상 고구려는 중국의 수∙당과 맞서 싸워서 이겼던 나라입니다. 통일 신라는 통일 이후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송악(松嶽)을 수도로 삼아서 송도(松都) 또는 개경(開京)이라 불렀습니다. 고려 중엽 이후 개경은 개성(開城)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송도는 지금의 북한 개성특별시 입니다. 고려 왕조 475년(918~1392)동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왕궁∙관아∙교육기관∙성곽∙사찰∙왕릉이 하나의 수도 체계를 이루었던 중세 한반도의 대표적인 수도 였습니다. 고려가 아라비아와 유럽으로 알려지면서 고려의 알파벳 표기 Korea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문 표기가 된 것입니다.
후삼국 전쟁에서 통일한 고려는, 고구려의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이어받아서 국방력이 강했습니다. 고구려에서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따와서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중국과 전쟁을 치루고 화친을 맺음으로써, 나라를 튼튼하게 지켜 냈습니다.
10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세는 한반도의 고려와 그 북쪽의 발해, 만주와 중국 대륙의 북쪽 거란 그리고 중원의 송나라가 대등한 국력으로 맞서고 있었습니다.
925년 거란은 발해를 공격하여 926년에 멸망하게 했습니다. 고려는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고구려의 후손들이 고려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고려는 *송나라와 화친→ 거란과 외교→ 필요하면 전쟁 →다시 거란과 화친*이라는 강∙온 양면 국방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993년 거란이 소손녕 장군을 앞장세워 대군으로 제1차 고려 침공을 자행해 왔습니다. 고려의 서희 장군이 소손녕과 담판을 합니다.
거란은 고려가 송나라와 외교 튼 것을 트집잡아 해명을 요구 했습니다. 서희 장군의 탁월한 외교적 논리는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아주 획기적인 쾌거 입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고, 고려와 거란 사이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면 양국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논지를 펼쳤습니다. 결국 거란은 고려와 고구려의 관계를 인정하고 철군을 합니다. 그 회담결과 강동 6주를 확보합니다.
흥화진∙용주∙철주∙통주∙곽주∙귀주 즉, 고구려 옛 영토 중 전략적 요충지 여섯 곳을 현란한 언설로 회복한 것입니다. 강동 6주를 얻음으로써 고려는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1010년 현종 때 거란이 제2차 침공을 해왔습니다. 거란은 개경을 점령했으나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현종은 피난 전략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 낸 것입니다.
1018년 거란이 소배압을 사령관으로 제3차 침공을 해왔습니다. 전략이 뛰어나고 유명한 강감찬 장군이 1019년 귀주 대첩에서, 거란군을 대파하여 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살수 대첩,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과 더불어 귀주 대첩은 우리민족이 혁혁한 전승을 거둔 4대 대첩의 하나입니다.
1231년에서 1259년에 걸친 항몽전쟁(抗蒙戰爭)은 거대한 원나라와 겨룬 전쟁입니다.
중국의 송나라는 몽고의 침입으로 망했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몽고에게 영토의 일부를 빼앗겼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여러 소공국 체제였으나, 몽고의 침략으로 러시아 제국이 형성되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원의 시조 징기스칸의 아들 쿠빌라이 칸 시절 몽골 제국은 국호를 대원(大元) 제국이라 하였고, 동쪽 한반도 고려에 대한 영향력으로부터 만주, 중국 본토, 티베트, 운남, 몽골 고원, 신장 그리고 서쪽으로 아라비아, 유럽 동부까지를 아울렀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이룩한 것입니다.
그런 몽고와 고려는 무려 30년간이나 전쟁을 한 것입니다.
개경이 함락되자 강화도로 천도를 하였습니다. 삼별초 고려 군대는 강화도가 함락되자 진도를 거쳐서 제주도로 이주를 하면서 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비록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큰 국가적 변란을 겪기는 했지만, 이처럼 강적을 맞아서 끈질기게 대항하는 고려의 끈질긴 민족성이 면면히 흘러서 오늘날 대한민국 강군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비록 핵 보유 5대 강국들의 강요로 핵무기를 보유하지는 못하지만, 일단 만들기 시작하면 6개월 이내에 핵무기를 제작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핵무기를 제외한 현대전 첨단 전략과 전술 무기의 위력은 세계 제6대 강국을 자랑합니다.
전쟁 얘기는 그만하고 송도의 유명한 유적들을 살펴봅니다.
만월대(滿月臺)는 가장 중요한 고려의 왕궁터 입니다. 오늘날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석축과 건물터가 남아 있습니다.
개성 성곽은 송악산을 뒷산으로 하여 조성되었습니다. 팔리장성, 외성과 내성으로 축조되어 주변 산세와 연결하여 수도를 방어하도록 설계 되어 있습니다. *내성 왕궁→ 도성→ 외곽 방어선 이라는 체계적 수도 방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성 남대문은 내성의 남쪽에 세운 중요한 성문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조선 시대에 중수된 것이지만, 개경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소중한 유적입니다.
선죽교(善竹橋)는 고려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에 의하여 피살된 고려 충절의 마지막 유적지 입니다.
*이몸이 죽어가서...*로 시작하는 단심가(丹心歌)는 국가를 향한 충절(忠節)의 대표적 시조 입니다. 선죽교는 고려의 최후를 상징하는 역사적 공간 입니다. 그 옆에 표충비(表忠碑)가 서있습니다.

고려 성균관(成均館)은 국가의 관리를 교육하던 곳입니다. 고려의 성균관이 조선의 성균관으로 맥을 이어온 것입니다.
개성 첨성대는 만월대 주변에 그 유적이 있습니다. 천문∙역법∙과학기술을 국가 통치에 활용했던 흔적입니다.
왕건릉은 태조 왕건의 무덤입니다. 왕건릉 주변에는 여러 왕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공민왕릉은 원나라를 축출해낸 공민왕과 그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능입니다.
공민왕 치세에 중국 홍건적들이 침공을 해왔습니다. 송나라가 망한 후 그 잔당들이 홍건적이 되어 고려를 침략해 왔던 것입니다.
공민왕이 안동(安東)으로 피란하여 그곳에 일시적 행재소(行在所)를 설치하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 때 왔던 문무 고관들의 행적이 계승되어 안동을 경북의 문화 중심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개경에서 가까운 벽란도(碧瀾渡) 푸른 물결이 이는 나루는 예성강(禮成江)의 포구(浦口) 입니다. 이 벽란도 국제 무역항을 통하여 예성강과 황해로 가는 물길이 열렸습니다. 중국, 아랍과 유럽 상인들이 들락거리던 국제 교역 도시 개경의 해상 관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개성은 문산의 지척에 있지만 가볼 수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