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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빚 갚는 대만, 곳간 채우는 싱가포르

류재근 기자
입력
재정 운용의 모범 사례 속 한국의 선택은
한국 경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쓰는 용기가 아니라 덜 쓰고 남기는 결단이다


 

호황기에 빚을 갚는 나라, 곳간을 채우는 나라


대만과 싱가포르가 던지는 재정의 교훈, 

     한국의 선택은


 

세계 경제가 회복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각국의 재정 운용 방식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어떤 나라는 경기가 좋을수록 빚부터 줄이고, 또 다른 나라는 호황을 기회 삼아 재정 곳간을 채운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만싱가포르다. 

 

이들의 선택은 오늘날 재정 여건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한국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대만은 경제가 호황일수록 국가 부채 관리에 더욱 엄격한 나라로 꼽힌다.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급증하며 세수가 늘어났던 시기에도 대만 정부는 확장 재정보다는 국가채무 비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만 헌법과 재정 규율에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부채 한도가 비교적 엄격하게 규정돼 있으며, 정치적 인기보다 재정 지속 가능성을 우선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호황은 일시적이지만 빚은 남는다는 인식이 정책 전반에 깔려 있는 셈이다.

 

싱가포르는 한발 더 나아간다. 이 나라는 경제가 좋을 때 세입을 늘려 미래 세대의 자산을 축적하는 전략을 택해왔다. 정부 재정은 기본적으로 균형 또는 흑자를 원칙으로 하며, 남는 재원은 국부펀드로 운용해 장기 수익을 창출한다. 

싱가포르는 경기 침체나 위기 상황이 닥칠 때 이 축적된 자산을 활용해 대규모 재정 투입을 단행할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다. 호황기에 곳간을 채워 위기에 대비하는 전형적인 모범 사례다.

 

반면 한국의 현실은 다소 다르다. 경기가 좋을 때든 나쁠 때든 재정은 늘 확장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복지 확대, 경기 부양, 각종 지원 정책이 반복되면서 국가채무는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특히 저성장·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 속에서 세입 기반은 약해지고, 의무지출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문제는 호황기에도 구조 개혁이나 부채 축소보다는 단기 성과에 초점을 맞춘 재정 운용이 반복됐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대만과 싱가포르는 재정을 ‘미래 선택의 자유를 지키는 수단’으로 본다. 지금의 유권자 만족보다 다음 세대의 정책 여력을 중시한다.

 반면 한국은 재정을 ‘현재 문제를 덮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결과 경기 침체가 오면 이미 재정 여력이 소진돼 정책 선택지가 좁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시사점은 분명하다.

 첫째, 호황기일수록 재정 긴축의 용기가 필요하다. 

경제가 잘 돌아갈 때 구조 개혁과 부채 관리에 나서야 위기 대응 능력이 생긴다.

 

 둘째, 재정 규율을 제도화해야 한다.

 정치 일정에 흔들리지 않는 부채 관리 원칙이 없다면 재정 건전성은 언제든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셋째, 재정을 소비가 아닌 축적과 투자의 관점에서 재설계해야 한다.
 

대만처럼 빚부터 갚거나, 싱가포르처럼 곳간을 채우는 선택은 단기간에 박수를 받기 어렵다. 그러나 재정은 인기 경쟁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의 체력을 좌우하는 기반이다.

 

 한국이 이제라도 호황기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지 않는다면, 다음 위기 앞에서 선택지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쓰는 용기가 아니라, 덜 쓰고 남기는 결단이다.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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