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손주가 되어 기록한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는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참전용사 한 사람의 소박한 바람이 인공지능을 만나 실제 자서전으로 탄생하고 있다. 고령의 전쟁 세대와 첨단 기술을 잇는 이 특별한 프로젝트의 이름은 ‘손주’. 손주가 조부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방식으로, AI가 참전용사와 대화하며 삶의 기록을 만들어낸다.
이 프로젝트는 포스텍(포항공과대학교) IT융합공학과 재학생 김민석(26) 씨가 기획·개발한 것으로, 기술을 통해 잊힌 희생을 되살리고 세대 간 연결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큰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AI 손주’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김씨의 가족이었다. 월남전에 참전한 큰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들려주던 전쟁 이야기와 “내 이야기도 누가 좀 남겨줬으면…”이라는 한 마디가 계기가 됐다. 그는 “전쟁을 겪은 분들의 개인적인 기억이야말로 후세가 평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록”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챗GPT를 기반으로 한 대화형 인공지능 인터페이스를 직접 개발했다. 이 모델은 참전용사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자서전을 작성한다. 다만 고령자의 경우 방언 사용이나 디지털 접근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중간에 사람이 전달자 역할을 맡는다. AI의 질문을 직접 읽어주고, 응답을 텍스트로 정확히 입력해주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사람이 자서전의 문장을 대신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술 방식과 문체, 이야기 구조는 오롯이 AI와 참전용사 간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된다.
AI가 쓰는 ‘맞춤 자서전’…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게
이 AI 모델은 단순히 자서전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독자의 연령이나 이해 수준을 고려한 ‘맞춤형 자서전’ 제작이 가능하다. 실제로 김씨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3명의 이야기를 각각 A4 5장 분량의 자서전으로 구성했으며,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체를 조정한 어린이용 버전도 제작했다.
이 자서전을 읽은 포항의 연일초등학교 학생들은 참전용사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는 등 뜻깊은 교류로 이어졌다. 김씨는 “AI가 정보를 구조화한 덕분에 버튼 하나로 다양한 버전의 자서전을 빠르게 만들 수 있다”며 “한 번의 인터뷰로 할아버지의 삶이 다양한 세대에게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로 기억을 복원하다
‘손주’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술 시연이 아니라, 세대 간 단절을 기술로 메우는 시도다. 김씨는 “기억을 기록하는 일은 단지 과거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국가보훈부와 협업해 더 많은 참전용사들의 자서전을 남기고, 나아가 유엔 참전국의 전쟁 유공자들까지 범위를 확장하는 계획도 구상 중이다.
김씨는 올 하반기 포스텍 인공지능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며,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사회와 동떨어지지 않는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