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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와 노예 해방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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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와 노예 해방의 여정

남철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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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17~18세기, 영국은 설탕, 목화, 담배 등 돈이 되는 사업으로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값싼(=무임금) 인력인 아프리카 노예들이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간주됐습니다. 또한  산업혁명의 결과로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 면화, 담배 등은 유럽 산업과 소비를 움직이는 핵심 자원이었습니다. 영국 리버풀, 브리스틀 같은 항구 도시들은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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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노예, 그 뒤의 보이지 않는 죽음들

 

한 명의 노예가 영국에 도착하거나 판매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희생됐을까요?

학자들의 역사적 분석과 추정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과정별 희생률

단계설명추정 사망률
① 아프리카 내 급습/납치노예사냥, 마을 습격 등10~30%
② 해안까지의 행진수백 km 묶인 채 이동10~20%
③ 대서양 항해 (Middle Passage)6~12주간 배에서15~25%
④ 도착 후 선별 및 판매병약하거나 저항한 자 살해됨5~10%
  • 영국은 약 310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운반했습니다.
  • 이 중 약 250만 명이 생존했으며, 나머지 수십만 명은 길 위에서, 배 안에서, 시장에서 죽었습니다.
  • 결국 “한 명의 노예 = 여러 명의 죽은 형제자매”였습니다.
https://ageofrevolution.org/wp-content/uploads/2018/11/LAL-337266.jpg
윌리엄 윌버포스가 의회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부르짖는 회화. 19세기 화가 C.L. Doughty에 의해 제작

영국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청년 시절 신앙적 회심을 경험한 뒤, 정치의 길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기게 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흑인 노예제 폐지에 일생을 바친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 목적이나 사회적 인기 때문이 아니라, 깊은 기독교적 신앙, 도덕적 양심, 그리고 인간 존엄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윌버포스의 노예폐지 운동 동기는 

 

1. 신앙적 회심 (Spiritual Conversion)

 

  • 1785년경, 그는 젊은 시절 화려한 정치적 생활을 하던 중 심한 내적 공허감과 회의를 겪습니다.
  • 이후 "복음주의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ity)"에 깊이 감화되어, 삶의 목적을 다시 정의하게 됩니다.
  • 그의 신앙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그 누구도 타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도덕적 원칙을 뿌리로 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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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버포스의 자서전 중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을 끝내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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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예제의 잔혹성에 대한 충격

 

  • 당대 노예제 실태를 조사한 토머스 클락슨과 여러 증인들의 증언을 들은 뒤, 윌버포스는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움직였다고 고백합니다. 노예선의 끔찍한 환경, 채찍질, 가족 분리, 강제 노동 등을 상세히 보고받은 그는, “이것을 외면하는 순간 나는 공범이 된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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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적 책임감과 특권의식

 

  • 그는 상류층 엘리트 출신으로서, 많은 권한과 자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권한을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신은 나에게 이 많은 것을 주셨으니, 나는 그것을 가장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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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친구와 신앙 공동체의 지지

 

  • 그는 같은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클래펌 섹트(Clapham Sect)”라는 작은 개혁 공동체를 꾸립니다.
  • 이들은 노예제, 아동 노동, 도박, 술 등 당대의 사회악을 함께 비판하며, 도덕적 국가 건설을 꿈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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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단념하지 않은 이유: 신념의 뿌리

 

  • 20년 넘게 의회에서 번번이 법안이 부결되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이유는 단 하나: “옳은 일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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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예제 폐지는 불가능해 보일지 몰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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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예제 폐지에 내 인생을 바쳤다”

 

  • 1787년, 윌버포스는 토머스 클락슨 등과 함께 노예무역 폐지 협회를 만들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 의회에서 수차례 거센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무려 20년 이상, 같은 법안을 매년 제출하며 “하나님은 이 일을 하라고 나를 부르셨다”는 신념 하나로 버텼습니다. 결국 1807년, 영국의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역사적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의회가 만장일치로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순간, 그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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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의 진심이 담긴 한마디는 “그 어떤 나라도, 한 사람의 자유를 빼앗을 권리는 없다.”였습니다.

그는 단지 법을 통과시킨 정치인이 아니라, 노예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며, 그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정의로운 친구’였습니다. 

 

후손들의 목소리는 “그는 백인이었지만, 우리의 진정한 벗이었다”라고 그를 칭송하였고 오늘날 많은 아프리카계 후손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 “그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이름 없는 조상이었을지도 모른다.”
  • “노예제를 만든 것도 백인이었지만, 그것을 부수려 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윌버포스였다.”
  • “정의는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 진심은 지금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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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 노예무역 폐지법 (1807) 노예제 완전 폐지법 (1833) — 그는 법이 통과되기 단 3일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날, 동료 국회의원들은 그의 집무실에 조용히 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윌버포스 없는 자유를 마주한다.”

 

산타가 추운 겨울에도 아이들에게 기쁨을 나누듯, 윌버포스는 가장 고통받는 이들에게 인간의 ‘자유’라는 선물을 전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완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영국 내 노예무역 폐지운동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미국 내 노예제 폐지에도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사상적, 도덕적, 국제적 영향을 준 중요한 선례였습니다. 

 

“한 사람이 시작한 물결, 대서양을 건너다”

 

윌버포스와 링컨, 56년을 잇는 자유의 다리

 

  • 윌버포스가 활동하던 1807년 영국 의회에서 노예무역을 금지시키는 법안 통과와 링컨 미국 대통령의 1863년 미국 남북전쟁 중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 발표는 비록 시차는 50년 넘게 나지만, 사상의 흐름과 국제 여론은 아래와 같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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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덕적 정당성의 전파

 

  • 윌버포스의 운동은 단순한 정치 활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기독교적 양심과 인간 존엄에 대한 호소였습니다. 이 도덕적 정당성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 "미국 북부의 많은 노예폐지론자들(abolitionists"은 윌버포스와 그의 연설, 영국의 운동을 인용하며 링컨 정부와 의회를 압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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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버포스가 시작한 바다 건너의 정의가, 이제 이 땅에서도 울려 퍼져야 한다.”
  • — 미국 퀘이커교도 노예폐지론자 발언 (184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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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제적 분위기와 압력

 

  • 영국은 윌버포스의 영향 아래 노예무역을 금지한 후, 자국 함대를 파견해 대서양 노예선 단속을 시작했고,
  • 점차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미국에 노예무역 금지를 외교적으로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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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외무부는 미국에 여러 차례 “도덕적 책임”을 거론하며 노예제도 폐지를 권유했습니다.
    이는 링컨이 대통령이 되던 시대, 국제 여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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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링컨과 윌버포스의 유사한 신념

 

  • 둘 다 신앙심이 깊고, 인간은 창조된 존재로서 자유의 권리가 있다는 사상을 공유했습니다.
  • 윌버포스는 "노예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훼손하는 죄악"이라 보았고,
  • 링컨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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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는 자신이 직접 건너가지 않은 땅에까지, 자유의 불씨를 전했습니다. 
그 불꽃을 미국 땅에서 불태운 이는 링컨이었습니다.

 

윌버포스가 ‘노예무역은 죄악’임을 입증했다면, 링컨은 ‘노예제 자체가 불의’임을 법으로 선언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은, 인류의 자유 연대기에서 빛나는 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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