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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나라는 달라도 사람의 편에 섰다…조선 곁에 남은 일본인 6명

성연주 기자
입력
아사카와 형제·후세 다쓰지·야나기 무네요시·소다 가이치·가네코 후미코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화와 사람을 위해 행동했던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AI 이미지로 재구성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화와 사람을 위해 행동했던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AI 이미지로 재구성했다.

독립운동가의 변호인석에 앉고, 사라질 광화문을 지키고,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다

 

최근 친일 행적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이어지면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선택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당시 조선인 가운데 일본에 협력한 이들이 있었던 반면, 일본인 가운데는 식민지 조선의 사람과 문화를 지키거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이들도 있었다.


아사카와 다쿠미·노리타카 형제, 후세 다쓰지, 야나기 무네요시, 소다 가이치, 가네코 후미코가 그들이다.


이들의 생각과 활동을 모두 같은 선상에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시대 안에서도 국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선택이 있었다. 여섯 사람을 지금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본인으로 태어나 제국의 흐름과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조선의 사람과 문화 곁에 섰던 여섯 명이다.


이들의 삶과 생각이 모두 같았던 것은 아니다. 일부에게는 식민지 조선을 바라본 시선에 한계가 있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 무엇을 보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 사람들의 밥상을 기록한 아사카와 다쿠미


1914년 조선에 온 일본인 임업기사 아사카와 다쿠미는 산림을 연구하다 조선 사람들의 평범한 살림살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가 찾아다닌 것은 값비싼 골동품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매일 밥을 먹던 작은 소반과 백자, 목가구였다. 지역마다 다른 이름과 모양, 제작법까지 조사해 사라질 수 있었던 생활문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1929년에는 『조선의 소반』을 펴냈고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도 참여했다. 1931년 39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생전에 조선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조선 땅에 묻어달라는 뜻을 남겼다.


그의 묘는 지금 서울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남아 있다.

 

깨진 도자기 조각을 주운 아사카와 노리타카


1913년 조선에 온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미술교사로 일하며 전국의 옛 가마터를 찾아다녔다. 그가 눈여겨본 것은 박물관에 놓인 완전한 도자기만이 아니었다.


땅에 묻히고 버려진 깨진 조각도 하나씩 모았다. 작은 파편에 남은 무늬와 흙, 굽의 형태를 살피며 조선 도자기의 제작 시기와 지역적 특징을 추적했다.


1924년에는 동생 다쿠미,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 참여했다.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도 오랜 세월 모은 조선 공예품과 도자기 연구 자료를 한국에 남겼다.


남들이 버린 도자기 조각은 그의 손에서 조선 도자기의 역사를 밝히는 자료가 됐다.


독립운동가의 옆자리에 앉은 후세 다쓰지


1919년 일본 법정에 조선인 유학생들이 피고인으로 섰다.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발표한 학생들이었다.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이들의 변호를 맡았다.


그 뒤 김지섭과 박열 등 독립운동가들의 재판에도 나섰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비판했고, 1926년에는 전남 나주까지 찾아가 농민들의 토지 문제를 조사했다.


그의 행동에는 대가도 따랐다. 변호사 자격을 정지당하고 수감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후세의 독립운동 지원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일본인 최초였다.


사라질 광화문을 보고 글을 쓴 야나기 무네요시


1922년 조선총독부가 광화문 철거를 추진하자 일본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글을 썼다.


그는 조선의 백자와 목공예, 생활용품에도 관심을 가졌다. 왕실의 보물뿐 아니라 이름 없는 장인이 만든 물건도 보존해야 할 문화라고 봤다.


1924년에는 아사카와 형제와 함께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다.


다만 야나기가 조선 미술을 바라본 시각에는 식민주의적 한계가 있었다는 학계의 비판도 있다. 광화문과 조선 공예를 지키려 했던 행동과 그의 한계는 함께 기록할 필요가 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의 끼니를 챙긴 소다 가이치


소다 가이치는 조선에서 교사로 일하다 사회사업에 뛰어들었다. 1921년부터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운영을 맡아 부모를 잃거나 거리에서 보호가 필요했던 아이들을 돌봤다.


그가 평생 보살핀 아이들은 1천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했던 것은 거창한 교육이나 구호가 아니었다. 하루를 버틸 밥과 밤에 몸을 누일 자리, 추위를 견딜 옷이었다.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갔던 소다는 1961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듬해 서울에서 생을 마쳤고,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스물세 살에 감옥에서 생을 마친 가네코 후미코


1903년 일본에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저항했다. 1923년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활동한 불령사에 참여하다 체포됐다.


가네코와 박열에게 내려진 판결은 사형이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가네코는 1926년 감옥에서 숨졌다. 스물세 살이었다.


그로부터 92년이 지난 2018년, 대한민국 정부는 가네코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여섯 사람이 남긴 것


여섯 사람을 모두 같은 평가로 묶을 수는 없다. 활동의 목적도 달랐고 시대를 바라보는 생각에도 차이가 있었다.


다만 남아 있는 기록은 구체적이다.


다쿠미에게는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던 소반이 남았고, 노리타카에게는 가마터에서 주운 도자기 조각이 남았다. 후세는 독립운동가의 변호인석에 앉았고, 야나기는 철거될 광화문 앞에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소다는 부모 잃은 아이들의 하루를 돌봤고, 가네코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다 스물세 살에 생을 마쳤다.


그들은 태어난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시대가 어두웠다고 해서 사람을 향한 마음까지 모두 어두웠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이 조선을 짓밟던 시대에도, 조선 사람의 손을 잡은 일본인들은 있었다.

성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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