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책 한 권이 남긴 빛… 서울대 동문 부부, ‘삼국사기’ 판본 기증하다”
![4일 오후 서울대 관악캠퍼스 규장각에서 삼국사기 판본 기증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판본을 서울대에 기증한 이윤경·이도영씨 부부, 정긍식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장. [사진제공 서울대 발전재단]](https://santanews.cdn.presscon.ai/prod/140/images/20251106/1762434924701_466270622.jpg)
서울 관악산 자락의 규장각에 오래된 숨결 하나가 도착했다. 16세기에 인쇄된 삼국사기 판본. 반세기 넘게 한 가정의 손에서 지켜져 온 이 귀중한 책은 서울대 의대 63학번 이도영(81) 씨와 간호대 65학번 이윤경(79) 씨 부부가 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두 사람의 선택은 단순한 소장품 기부가 아니라, 역사를 향한 신념의 증명이었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지난 1970년대 인사동에서 시작된다.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시절, 고(故) 민영의 여사는 폐지 더미 속에서도 귀한 책들을 찾아내며 “이런 자료들이 사라지면 역사가 잊힌다”고 했다. 그때 손자와 며느리였던 두 사람은 고서를 구매해 소중히 간직했고, 외삼촌이던 고(故) 민영규 연세대 명예교수는 “가치는 돈이 아니라 의미에서 나온다”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 후 50여 년 동안 이 판본은 한지에 싸여 가족의 손끝에서 세심하게 보존됐다. 규장각 관계자는 “보존 상태가 매우 훌륭하며, 조선 전기 인쇄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감정 결과, 이번 기증본은 국보로 지정된 옥산서원본보다 앞서 인쇄된 것으로 밝혀졌다.
기증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이도영 씨는 “요즘은 SNS 유언비어로 잘못된 역사가 너무 쉽게 퍼진다”며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일이 곧 진짜 애국”이라고 말했다. 이윤경 씨도 “별것 아닌 줄 알았던 책 한 권이 이렇게 소중할 줄 몰랐다”며 “다른 분들도 집 안의 오래된 책들을 꺼내 세상과 나눴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이번 기증 외에도 서울대 의대 장학금, 간호대 건립기금 등 수억 원을 꾸준히 후원해왔다. 그들의 나눔은 돈의 크기보다, 세대를 잇는 ‘책임’의 깊이로 이어지고 있다.
규장각의 서가에 한 권의 고서가 더해졌을 뿐인데, 그 자리는 유난히 따뜻했다. 낡은 종이와 먹빛 속에는 한 세대의 손끝이 남긴 진심이 묻어 있었다.
기부의 본질은 물질이 아니라 ‘보존의 용기’라는 걸, 이 부부는 보여줬다.
그들의 선택은 잊히는 시대에 ‘기억을 지키는 일’의 가치를 다시 일깨운다.
책 한 권이 역사를 살리고, 마음 한 켠의 신뢰를 되살린다.
그 따뜻한 빛이 오래도록 학생들과 시민들의 눈에 머물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