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 한국 미술을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 미술계의 풍경은 양적으로는 풍년을 누리는 듯보인다. 국내외 갤러리와 컬렉터가 몰려드는 아트페어는 성황을 이루고, MZ 세대로 대표되는 새로운 컬렉터 층이 등장하며 시장에 활기를 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활기 뒤에는 급변하는 환경과 구조적 취약성이라는 중차대한 과제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 미술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생태계 전반의 근본적인 성숙을 도모해야 할 때이다.
1. 풍요와 빈곤의 공존, 한국 미술계의 딜레마
최근 한국 미술계는 그 어느 때보다 외부의 주목을 받고 있다.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의 정착은 아시아 미술 시장의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열었으며, 온라인 플랫폼과 SNS을 통한 미술의 대중화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확산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NFT와 생성형 AI 등 디지털 기술의 부상은 예술의 창작과 유통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촉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인 번영 이면에는 심각한 불균형이 존재한다. 시장의 관심과 자본이 소수의 유명 작가와 상업적으로 성공한 갤러리에게 집중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지역별, 장르별로 예술 향유와 지원이 균등하게 회복되지 않으며, 기초예술 생태계는 여전히 취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는 마치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상가건물이 내부 기둥은 부실한 것과 같은 모순된 현실이다.
2. 근본적인 병폐, 미술계가 직면한 구조적 과제
번영의 그림자에 가려진 근본적인 문제들을 세 가지 차원에서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신뢰를 훼손하는 시장 시스템-위작 유통과 인위적인 가격 조작 의혹은 미술 시장의 정직성을 의심케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비공개 거래가 성행하고 계약서 없이 이루어지는 느슨한 거래 관행은 시장의 투명성을 해치고 건강한 성장을 가로막는다. 신뢰가 무너진 시장에선 진정한 가치 평가가 불가능해진다.
둘째, 유통 구조의 낙후와 인프라 부족-국내 미술 시장의 유통 구조는 여전히 후진적인 거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화랑의 기능이 미약하고, 전문적인 아트 딜러와 평론가가 부족하다. 특히 서울 강남 지역에 지나치게 편중된 화랑 인프라는 지역 미술의 균형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셋째, 국제적 경쟁력 부족과 미흡한 지원 정책-한국 미술의 국제적 위상은 아직 국내에서의 위상에 미치지 못한다. 세계적인 경매 회사가 국내에 진출했지만, 실질적인 교류와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또한 생성형 AI 등 기술 변화에 대응한 제도적,정책적 지원 체계는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3. 미래를 여는 길, 생태계의 체질 개선을 위한 제언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태계 전체의 체질을 개선하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 신뢰 회복을 위한 시스템 정비 - 위작 유통과 가격 조작에 대한 강력한 법적 제재와 함께 작품 보증서 및 유통 기록서 첨부 거래를 일반화해야 한다. 거래의 투명성을 높여 시장 참여자들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모든 발전의 출발점이다.
• 다양성과 전문성 확보 - 시장의 관심이 소수에 집중되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유능한 신진 작가 발굴과 지원에 나서야 한다. 동시에 화랑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작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고객을 교육하는 전문 유통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 디지털 전환과 국제화 적극 대응 - AI 생성 예술, NFT, 온라인 플랫폼 등 디지털 환경을 예술의 새로운 장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흡수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국 미술이 한국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제 시장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이 마련되어야 한다.
• 기초 생태계 강화를 위한 전략적 지원 - 화려한 메가 이벤트 지원보다는 지역의 미술관과 레지던시 프로그램, 신진 작가 지원 사업 등 기초예술 생태계를 튼튼히 하는 데 정책적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건강한 뿌리에서야만 열매도 풍성해진다.
한국 미술은 이제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야 할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기술의 발전과 세계화의 흐름은 위기이자 기회이다. 화려한 성과에 현혹되기보다는 우리 미술계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고 생태계 전반의 건강을 회복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할 때이다. 작가, 화랑, 평론가, 컬렉터, 정책 기관이 모두 함께 고민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한국 미술의 진정한 번영이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