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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보다 민원 대응이 더 힘들어요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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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민원 공화국이 된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민원 공화국을 넘어 서로를 존중하는 공존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민원 넣겠다”가 일상이 된 사회 —  대한민국은 왜 ‘민원 공화국’이 됐나

 

최근 전국 곳곳의 공공기관과 학교, 지방자치단체가 이른바 ‘악성 민원’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유치원 교사에게 밤늦게 수십 통의 메시지를 보내는 학부모, 사소한 생활 소음에도 반복 신고를 넣는 주민, 공무원을 상대로 폭언과 협박을 일삼는 사례까지 등장하면서 사회 전반의 피로도가 커지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국민신문고에 접수되는 민원은 연간 1300만 건을 넘어섰다. 단순한 불편 신고를 넘어 사회적 갈등과 감정의 배출 창구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학교와 공공기관을 무너뜨리는 ‘감정형 민원’

 

교육 현장은 이미 한계 상황이라는 목소리가 많다. 

일부 학부모들은 자녀 간 사소한 다툼에도 학교폭력 신고를 요구하거나 교사의 생활지도 자체를 문제 삼는다.

 유치원에서는 아이가 넘어져 무릎이 까진 일로 장문의 항의 전화와 민원이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교사들은 “교육보다 민원 대응이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공공기관도 사정은 비슷하다. 

주차 문제, 층간소음, 쓰레기 배출 같은 생활 갈등이 곧바로 민원과 신고로 이어진다. 

일부 민원인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담당 공무원의 이름을 공개하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격성 글을 올리기도 한다. 

한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는 “민원이 아니라 분노를 투척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단순한 시민 의식 문제만으로 보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사회 구조적 피로와 불신이 악성 민원의 배경이라고 분석한다.

 

“참지 않는다” — 한국 사회 특유의 압축     스트레스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 드문 속도의 산업화와 경쟁을 겪었다. 

치열한 입시와 취업 경쟁, 높은 집값과 불안정한 노동 환경 속에서 시민들의 스트레스는 극단적으로 누적됐다. 

문제는 이 스트레스가 제도적 토론이나 공동체적 대화보다 ‘즉각적 항의’ 형태로 분출된다는 점이다.

 

특히 디지털 문화는 민원의 문턱을 크게 낮췄다. 

스마트폰 하나로 24시간 신고와 민원 접수가 가능해지면서 감정적 반응도 즉시 행동으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참고 넘겼을 갈등도 이제는 캡처와 녹음,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인문사회학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강한 성과주의와 권리 의식의 비대화도 원인으로 꼽힌다. 

산업화 시대에는 “참고 견디는 문화”가 강했다면, 오늘날에는 “내 권리는 즉시 보장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권리 의식 자체는 민주사회의 긍정적 변화지만, 타인의 권리와 공공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을 때 공격적 민원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 약화 현상도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는 이웃이나 학교, 지역사회 안에서 비공식적으로 조정되던 갈등이 이제는 곧바로 행정기관과 법적 절차로 향한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화하기보다 “기관이 해결하라”는 방식이 일반화된 것이다.

 

해외보다 왜 더 심한가

 

미국이나 유럽도 민원과 소송 문화가 존재하지만 한국처럼 생활 전반이 민원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상은 상대적으로 드물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와 높은 교육열, 경쟁 중심 사회를 배경으로 꼽는다.

 

무엇보다 한국은 행정 접근성이 매우 높다. 

온라인 민원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어 누구나 손쉽게 신고할 수 있다. 

반면 민원 남용에 대한 제재 장치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악성 반복 민원이나 허위 민원에도 공무원과 교사가 사실상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감정 표현을 건강하게 조율하는 사회적 문화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기보다 극단적 항의와 여론전으로 끌고 가는 풍토가 반복되면서 사회 전체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권리’와 ‘책임’의 균형

 

전문가들은 민원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민원은 행정의 문제를 개선하고 시민 권리를 보장하는 중요한 제도다. 

다만 악성 민원과 정당한 민원을 구분하는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우선 반복적 폭언·협박 민원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강화돼야 한다. 

교사와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악성 민원에는 상담 중단권과 법률 지원 체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시민 대상 갈등 조정 교육과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신뢰 회복이다. 

전문가들은 “상대방을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시민으로 바라보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권리만 외치는 사회는 결국 모두를 지치게 만든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민원 공화국’을 넘어 서로를 존중하는 공존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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