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배척하는 사회, 지속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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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화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다. 대한민국 초고령사회 진입는 이미 현실이 되었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각종 출산 장려 정책을 쏟아내고, 기업은 결혼·육아 지원을 늘리지만 정작 가장 기초적인 단계인 ‘연애’에 대해서는 사회가 얼마나 관대해졌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 여러 커뮤니티와 기사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종교단체나 동호회 등에서 “연애하러 왔다”는 이유로 눈총을 받거나 배척당하는 사례다. 본래 취지와 다르다는 이유다. 그러나 이 시선은 과연 타당한가.
연애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누군가는 신앙을 찾기 위해 교회를 찾고, 누군가는 취미를 위해 동호회에 가입한다. 하지만 인간이 모인 공간에서 관계가 생기고 감정이 싹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그런 만남이 계기가 되어 신앙심이 깊어지거나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커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관계를 배제한 공동체는 결국 지속성을 잃는다.
특히 지금의 청년 세대는 연애 자체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경제적 부담, 주거 문제, 불안정한 미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돈이 없어서 연애를 못 한다”는 말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마저 연애를 억제하거나 눈치 주는 공간이 된다면, 젊은 세대는 어디에서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가.
연애를 장려하자는 말은 단순히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자는 수준을 넘어선다. 이는 사회 구조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연애가 줄어들면 결혼이 줄고, 결혼이 줄면 출산 역시 줄어든다. 아무리 정책적으로 출산을 장려해도, 관계 형성 자체가 위축된 사회에서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공간이 연애 중심으로 변질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연애하러 왔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태도 역시 지나치게 경직된 시선이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공동체의 목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러운 인간 관계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조건 없는 연애’의 가치다. 화려한 데이트 비용이 없어도, 가난을 함께 견디며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오히려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관계보다 더 깊고 지속적인 유대가 형성되기도 한다.
초고령화 시대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연애를 불편해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애는 사소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미래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다.
이제는 묻기보다 인정할 때다.
“왜 연애하러 왔냐”가 아니라,
“그 인연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