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혜초와 고선지의 흔적
산타 뉴스는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 대장정 15500Km, 중국을 보다>, <물속에 쓴 이름들, 손호철의 이탈리아 사상 기행>, <카미노 데 쿠바: 즐거운 혁명의 나라 쿠바를 가다> 등 역사기행 책을 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의 여행기를 연재한다.
이번 여행기는 지난 7월 손 교수가 지상의 낙원인 ‘샹그릴라 ’이자 세계 최장수 마을인 파키스탄의 훈자계곡을 거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길’이라는 카라코룸하이웨이로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을 건너 위구르족의 고향인 중국의 신장에 이르는 오지를 다녀온 여행기다.
그의 여행기를 여행 중 찍은 사진을 중심으로 연재한다.
“마음껏 가져가세요!”. 1903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레오는 중국 간쑤성 돈황의 막고굴 장경동 관리인에서 이곳에 보관 중인 문서들을 사고 싶다고 했다. 말로만 전해지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9세기 당나라 승려 헤림이 쓴 <일체경음의>에 혜초가 지은 것으로 소개된 <왕오천축국전>이 펠로오가 돈황에서 사온 희귀고서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 책은 혜초가 인도로 가기 위해 해로로 여행한 앞부분은 없어졌고 파미르고원을 통해 육로로 귀국하는 과정이 남아있는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두성. 중국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돌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타슈쿠르간에는 15세기 전 이곳을 지배하던 타지크 왕국이 세운 석두성이 있다. 이후 이곳을 지배한 여러 정치세력들은 이 성을 증축하고 보강했다. 특히 이 성은 혜초와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 머문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각별하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실크로드에 대한 각종 자료를 진열한 석두성 부속 박물관이 인상적이었다. 박물관들이 들어가자 제일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 커다란 청동 부조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주요인물들이 조각한 것이다.

제일 오른쪽은 ‘실크로드’의 아버지 장건(?-기원전 114년)이다. 그는 한나라 시절 계속 침략하는 흉노를 제어하기 위해 서쪽의 대월지와 동맹을 맺으라는 임무를 띠고 서역으로 향했다. 흉노에게 붙잡혀 결혼하고 정착하는 척하다가 탈출하는 등 영화같이 파란만장한 역경을 겪고 돌아와 서역에 대한 정보를 알림으로써 실크로드 개척의 첫 단추를 끼웠다.


장건 부조에 이어 실크로드 개척에 기여한 주요 인물들의 부조가 이어지고 있다. 그 옆이 <서유기> 삼장법사의 모델인 현장 스님(602-664)이다. 당나라 초기 고승인 그는 불경을 연구하기 위해 627년 인도로 가서 10년 이상 공부한 뒤 귀국해 <대당서역기>를 썼다. 이 책은 서역과 인도에 대한 뛰어난 사료로 <서유기>의 원형이다. 그 중요성답게 현장 스님은 동상까지 만들어 자세히 설명했다.

그 왼쪽이 있는 것이 칼을 차고 있는 고선지(?-755) 장군이다.
고구려 유민인 그는 1만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 정벌에 나서 72개국을 정벌했고 중앙아시아(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강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동맹국의 배신으로 탈라스전투에서 패배했고, 안 녹산의 난과 관련해 모함으로 참수 당한 비운의 무장이다.


진열된 옛 실크로드 지도와 실크로드 관련 연표도 흥미롭다. 실크로드의 다양한 경로들을 자세히 묘사했고 각 왕조와 시기별 실크로드 개척 노력을 잘 정리해 놓았다. 다만 파미르고원의 박물관이라 해상 실크로드는 없고 육로만 그린 것이 아쉬웠다.

파미르고원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다. 파미르고원은 “실크로드가 가장 밀집한 지역”이며 “모든 산의 아버지이자 모든 강의 원류”다.

당나라 시절의 지도도 걸려 있었는데, 신라가 정확히 표기되어 있다. 이후 제작된 서구의 지도들에 비해 훨씬 오래전에 제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들과 달리 한반도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어 놀라웠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지는 중국의 장안(오늘의 시안)이 아니라 신라의 경주다.
정수일 선생님이 밝혀냈듯이, 아랍의 문헌에는 신라라는 나라 이름이 명확히 나오며 비단, 도자기, 칼, 사향 등 11개 물품을 수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괘릉 앞에 서 있는 무인 상이 아랍인을 닮았으며 신라시대 향가 ‘처용가’에 나오는 처용도 아랍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도 신라와 아랍과의 교역을 잘 보여주고 있다.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나타났다.
혜초다. 혜초에 대한 설명은 혜초가 다녀간 지역에 대한 지도와 ‘당나라 시대 신라승려’로 시작되는 간단한 인적 사항, 그리고 혜초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혜초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설이 있는데 다수설에 따르면 15살(소수설 19살)에 신라를 떠나 중국 광조우로 가서 불교공부를 하다가 스승의 권유로 19살(23살) 인도로 떠나 23살(27살)에 장안으로 돌아가, 이후 근 60년간 불경을 공부하다 열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4년 동안 2만 Km를 여행하며 40개국을 관찰하고, 그 시대로는 선구적으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사회사적 기록을 남겼다.
인도로 갈 때는 광조우를 떠나 배로 말레지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 동남아를 거쳐 갔고, 인도 도착 후에는 도보로 인도의 다섯 천축국을 경험했다.
이어 파키스탄의 간다라미술 발생지인 탁실라, 길기트, 파미르고원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페르시아까지 여행했다.
이후 키르기스스탄에 갔다가 파미르를 넘어 타슈쿠르간에 도착했고 거기서 카슈가르, 쿠차, 돈황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2만 Km 중 해로를 대강 6개월, 1만Km로 잡으면, 3년 반 동안 서울에서 마드라드까지의 직선거리에 해당되는 1만Km를 걸은 것이다.
전시물 중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혜초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키만큼 높은 지게에 각종 여행용품을 싣고 걷고 있었다(귀국해 정수일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다시 보니, 이 사진은 이 책에 실려있는 것으로 한국에서 당시 의상에 대한 고증을 거쳐 그린 그림이었다).
‘고대판 120리터 초대형 배낭’인 셈이다. 혜초가 불경을 제대로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저 무거운 지게를 지고 파미르고원의 설산을 넘었을 것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특히 그는 어리다면 어린 20대 초반의 나이에 추위에 떨면서 도둑까지 들끓는 위험한 벼랑길을 눈물을 흘리면서 걸으면서,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남겼다.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신라)으로 날라가리



혜초 다음에는 친숙한 이름이 나타났다. ‘오공’스님이다. <서유기>의 손오공은 소설적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오공 스님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오공 다음에는 고선지 장군이 나타났다.
고선지 장군은 ‘활의 나라’ 고구려 출신답게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었다. “고선지의 원정은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업적을 뛰어넘는다.”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연구한 영국의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의 평가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해발 2000미터의 알프스를 넘었다면, 고선지는 이보다 두 배나 높은 해발 4000미터의 파미르고원을 넘었기 때문이다.
7세기경, 내가 거쳐온 파키스탄 길기트에 소발률이라는 작은 왕국이 있었다. 길기트는 당나라의 서진정책에 위협이 되고 있던 티베트와 동맹을 맺었다. 당 군은 소발률을 손보려 했지만, 산악전투에 약한 당 군은 연이어 패배했다. 당이 택한 카드는 고선지 장군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 당은 이민족 포로를 기용하는 정책에 의해 고구려 군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장군으로 썼지만, 반란을 못하도록 서역으로 가는 길목인 간쑤성 사막지대로 보냈다 이 지역에서 자란 고선지는 군에 들어가 유격대장으로 일찍이 공을 세워 고속 승진했다. 서역정벌 명령을 받은 고선지는 747년 40대의 나이(출생연도가 불분명해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에 부하 1만 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
그는 설산의 추위와 고산병에 시달리는 군사들을 독려해 고원 요새를 지키는 티베트군을 격파하고 해발 4000미터의 파미르고원을 넘어 길기트로 쳐들어갔다(고선지가 내가 지나온 길기트를 정벌했다는 것은 여행을 다녀와 자료를 정리하며 뒤늦게 알았다). 설마 당 군이 파미르고원을 넘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한 길기트의 왕은 혼비백산해 도망갔다가 항복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지역의 72개국이 당에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고선지는 750년 서아프가니스탄지역의 동맹국이 공격을 당하자 다시 파미르고원을 넘어 공격군을 정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문제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텐산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진군했다. 4000미터의 파미르고원을 넘은 고선지에게 텐산산맥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는 쉽게 텐산을 넘어 정벌에 성공했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이 항복 의사를 밝혔음에도 이를 공격, 약탈하고 왕을 압송해 처형함으로써 지역의 민심을 잃었다(고선지는 용맹한 용장이었는지 모르지만 덕이나 지혜를 가진 덕장이나 지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희생된 왕의 아들이 이슬람제국(아바스왕조)에 도움을 청하자 이슬람 세력이 출동해 751년 탈라스강(현 키르기스스탄)에서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이슬람 세력이 부딪친 역사적인 이 전투에서 고선지는 오랜 원정에 따른 피로와 동맹군의 배신으로 참패하고 만다.
이 패배로 중국의 서역정벌은 중단됐고 중앙아시아는 이후 이슬람 국가로 변해 지금에 이르게 된다.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당의 군사 중 제지기술자들이 있어 이들이 이슬람에 제지술을 전해 줬고 이 기술이 다시 유럽에 전파됐다니,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전투의 패배를 통해 의도하지 않게 인류의 문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그가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아랍과 유럽 제지술이 훨씬 늦게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 20년 전 중앙아시아를 여행했을 때 탈라스 강가에서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던 기억,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궁전 벽화에서 새 깃털 모자를 쓴 고구려 사신 두 명을 보고 7세기에 고구려가 중앙아시아와 교류했다는 사실에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박물관을 나와 성으로 올라갔다. 여러 시대를 거치며 증축하고 보강한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과 달리 당시 흥성했던 불교의 힘을 보여주는 듯, 성에는 불교 사찰의 유적이 남아 있었다. 인도를 출발해 목숨을 걸고 설산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이곳에 도착한 혜초가,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뒤 1만 명의 군대를 데리고 이곳에 도착해 눈 덮은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 원정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낸 고선지 장군이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석두성은 성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이 절경이다. 멀리 구름과 안개로 설산이 가려진 가운데 강이 흐르는 푸른 초원에서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은 또 다른 샹그릴라였다. 이 평화로운 경치를 한참 보고 있자, 문득 이 소중 두 마리가 환생한 혜초와 고선지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착각이 들었다. 혜초 스님과 고선지 장군, 영생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