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면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불쌍한 사람을 한 사마리아 사람이 헌신적으로 보살펴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부르고,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이라는 표현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나 사역, 기관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굳이 사마리아인을 착한 사람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을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으로 설정하셨을까요? 이 비유의 맥락을 살펴봅니다.
이 비유는 한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예수님께 이 율법 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율법 교사에게 그렇게 사랑하는 삶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구약뿐 아니라 신약 성경도 사랑과 영원한 생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요한일서 3:14, 새번역).
이 율법 교사도 성경 전문가답게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서 ‘이웃 사랑’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당시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을 뒤엎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율법 교사의 대화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가서 너도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라.”
그럼 이 대화의 첫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이 질문과 대답을 연결하면 이런 가르침이 됩니다. “네가 만약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으면, 이 이야기 속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라.”
당시 유대인들은 주로 종교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고, ‘이웃’의 범위 역시 자기 민족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종교 시스템의 중심인 성전에서, 종교 행위의 핵심인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들도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영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반대로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규정했던 사마리아인도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움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때 하나님 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고, 그런 삶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만 봐도 면역력이 좋아진다는 소위 ‘마더 테레사 효과(Mother Teresa Effect)’와 같은 현상들은 모두 우리의 그런 본성을 증명합니다.
스웨덴의 현자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Bjorn Natthiko Lindeblad, 1961~2022)는 대표작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자신이 TV 프로그램에서 본 문구를 인용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이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지난 7월 9일 동두천에서 한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자기 비상금을 털어 한 노점 할머니의 물건을 모두 사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할머니께서 물건을 빨리 팔고 집에 가서 쉬시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라며 “꼭 필요할 때 쓰려고 모은 비상금이었는데 그날이 돈을 써야 할 때였던 것 같다. 돈이 아깝지 않다”라고 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 뉴스를 보면서 이 학생이 이 할머니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만신창이가 된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며 ‘선한 사마리아인’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