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의 ‘삼촌’ 퓰너… 한미 보수의 조용한 가교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지난 2022년 여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 개막식장에서 미국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 에드윈 퓰너(Edwin Feulner) 전 헤리티지재단 회장을 “삼촌”이라 부르며 포옹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두 사람은 단순한 연사와 기업인의 관계를 넘어, 오랜 시간 신뢰와 존중으로 이어진 인연을 맺어온 사이였다.
이 회장은 생전 부친인 故 이건희 회장을 기리기 위해 던힐(Dunhill) 브랜드에 맞춤 제작을 의뢰해 총 20개의 고급 만년필을 만들었고, 이 중 하나를 퓰너 회장에게 선물했다. 해당 만년필은 단순한 기념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 상징물로, 부친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인물들에게만 전달되었다. 퓰너 회장이 그중 한 명이었다는 점은, 그가 삼성과 이건희 회장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퓰너 회장은 단순한 학자나 재단 운영자를 넘어, 한국과 미국 보수 진영 사이에서 실질적인 가교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그는 헤리티지재단을 통해 미국 정치권 내에서 한국의 가치를 높이고,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한 한미 공조의 필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특히 아산정책연구원의 명예이사장이자 현대가의 맏형인 정몽준 전 의원과는 수십 년간 개인적인 교류를 이어왔다. 퓰너 회장은 자신이 운영하던 재단 내에 ‘정주영 룸’과 ‘이병철 룸’이라는 이름의 회의실을 마련해 두 인물의 이름을 기념했다. 이는 단순한 명명 이상의 상징성을 지닌 것으로, 한국 경제를 이끈 거인들에 대한 그의 경의와 애정을 보여준다.
그의 이런 행보는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드문 사례로 꼽힌다. 퓰너는 보수 정치 철학에 충실한 인물이면서도, 국제적 안목을 갖고 한국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키워왔다. 그는 생전 “한국은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 중 하나”라며, “미국은 한국을 단순한 동맹이 아닌 모범적 파트너로 대우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은 미 정계에서도 울림이 있었다.
정계 인맥도 화려하다. 퓰너는 1960년대 미국 의회에서 보좌관으로 근무할 당시, 대학생 신분이던 힐러리 클린턴(훗날 미국 국무장관)을 인턴으로 받아들인 바 있다. 그는 생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힐러리는 당시는 공화당 성향의 매우 똘똘하고 야심찬 학생이었다”고 회상하며, “하지만 다른 의원에게 인턴을 빼앗기고 말았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와의 접점도 다양했다. 그는 한화그룹의 이사회 외부이사로 참여하며 국내 기업의 거버넌스와 글로벌 전략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한양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서는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이는 학계와 산업계 모두로부터 그가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퓰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6월, 시카고에서 조카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으며, 현지에서 건강이 악화돼 입원 치료를 받던 중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별세했다. 향년 83세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별세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아쉬움을 낳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린다 여사와 아들 에드윈 주니어, 딸 에밀리가 있다.
조용하지만 꾸준히 이어져온 그의 한미 교류 활동은, 거창한 담론보다 사람과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온 민간외교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이재용 회장과의 오랜 관계는, 단순한 사업적 파트너십을 넘어 신뢰로 이어진 사적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교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