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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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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시대 은퇴란 없다 - 노파이어족의 노하우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이다.  덜 쓰고 나누며 배우는 삶이 아름답다

 

• 노파이어족, 불을 끄듯 일찍 은퇴한 세대의 생존 전략

 

― 100세 시대, 퇴직 이후 40년을 살아가는 법


불을 끄다(FIRE)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 한때 조기 은퇴의 상징이었다면, 최근에는 노파이어족(No-FIRE)이란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더 이상 은퇴가 해답이 아닌 시대, 100세까지 살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 일을 멈추지 않고 지속 가능한 생존을 택한 은퇴세대들의 현상이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 은퇴는 사치가 된 시대 — 일이 곧 생존이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67세의 김모씨는 3년 전 회사에서 퇴직한 후에도 동네 공방을 열어 매일 출근한다.  ‘퇴직금과 국민연금만으로는 한 달 생활비도 버겁습니다. 그런데 일하다 보면 사람도 만나고,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생겨요.’ 

김 씨의 말처럼, 일은 이제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정체성과 사회적 연결의 끈이 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0세 이상 취업자 수는 10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고령층의 노동시장 재진입이 활발해지면서, 은퇴 후에도 일을 계속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바뀌고 있다. 


전문가들은 100세 시대는 60세 은퇴 개념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었다며 일하는 노년, 활동적 고령층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분석한다.

 


■ ‘노파이어족’의 생존 노하우 — 덜 쓰고, 나누며, 배운다

 

노파이어족은 조기 은퇴 대신 지속 가능한 일과 삶을 목표로 한다. 그들의 공통된 생존 전략은 ①소비 절제, ②소득 다변화, ③학습과 재취업, ④공유와 관계망 유지로 요약된다.

 

첫째, 소비 절제는 노파이어족의 기본 철학이다.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자가 수리·홈쿠킹·지역 교류 활동으로 실질적인 생활비를 절감한다.

 

둘째, 소득 다변화를 위해 온라인 강의, 공예품 판매, 택배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형 수입을 추구한다. 한 70세 은퇴자는 유튜브로 정원 가꾸기 영상을 올리며 소소하게 광고 수입을 얻는다며 나이와 상관없이 배워서 벌 수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셋째, 학습과 재교육이 활발하다. 지방자치단체의 평생교육원이나 복지관 강좌에는 디지털 금융, 온라인 마케팅, 창업 실무 과정이 인기다. 65세 이상 수강생 비율이 40%를 넘는 곳도 있다. 이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제2의 경제활동으로의 발판이 된다.

 

마지막으로 관계망 유지도 중요하다. 노년의 고립은 건강보다 무서운 위험으로 꼽힌다. 노파이어족은 지역 커뮤니티나 봉사단체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정신적 안정과 자존감을 얻는다.

 


■ 두 번째 직업으로 삶을 확장한 사람들

 

전북 익산의 박모(71) 씨는 35년간 근무한 교직을 마친 뒤 지역 작은 도서관의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퇴직이 끝이 아니라, 인생 2막의 입학식이었다’고 말한다. 도시락을 싸와 아이들과 책을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일터라고 한다.

 

부산의 한 부부는 60대 중반에 퇴직 후 작은 카페를 열었다. 은퇴 후 창업 실패율 80%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지역 어르신들이 모이는 소통 카페로 공간을 운영하며 매달 안정적인 수익을 낸다.

서울 성북구의 윤모(68) 씨는 65세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그는 ‘은퇴는 새로운 일을 찾으라는 신호였다’며 나이 든 손님들이 당신 덕분에 용기를 얻는다고 말할 때마다 다시 살아난다고 전한다.

 


■ 100세 시대, 노후는 더 이상 휴식이 아니다

 

한국의 기대수명은 83세를 넘어섰고, 100세 이상 인구도 빠르게 늘고 있다. 하지만 노후 자산은 여전히 불충분하다. 국민연금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고령층의 60% 이상이 은퇴 후 경제적 불안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노파이어족’의 등장을 단순한 개인의 생존 전략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변화의 징후로 본다. 

서울대 사회학과 이모 교수는 ‘국가가 평생고용과 연금을 책임질 수 없게 된 시대에서, 개인은 스스로 지속 가능한 경제적 자립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며 노파이어족은 새로운 사회계약의 첫 실험자들이라고 평가했다.

 


■ 일하는 노년이 사회의 자산이 되려면

 

정부와 지자체는 이미 고령층을 위한 재취업·사회공헌 일자리를 확대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자리 질은 낮고, 임금은 불안정하다. 단순노무 중심의 단기 일자리보다는 경험과 기술을 살릴 수 있는 전문형·사회적 일자리 확대가 절실하다.

한편, 디지털 경제 속에서 지식·콘텐츠 기반 노년 일자리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70대 유튜버, 시니어 여행 해설사, 고령층 전문 상담사 등은 이미 새로운 직업군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

 

노파이어족의 삶은 멈춤이 아닌 연속의 삶이다.
일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고, 세대 간 교류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이들의 모습은 한국 사회가 맞이한 100세 시대의 새로운 초상이다.

 

은퇴는 더 이상 종착역이 아니다.
이제는 일하며 사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생존의 길이 되고 있다.

 

산타뉴스에서도 이들의 힘찬 활동을 응원한다.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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