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R&D 투자 119조 원의 역설, ‘첫 고객’ 없는 혁신은 신기루일 뿐
새로운 기술로 세상을 바꾸겠다며 창업 전선에 뛰어든 이들이 제품을 완성하고 가장 먼저 마주하는 벽은 차가운 기술적 난제가 아니다.
바로
"누가 이 제품을 써봤나요?
납품 실적이 있습니까?"라는 지독히도 비논리적인 질문이다.
신제품(New Product)을 들고 온 이에게 ‘기존 실적(Reference)’을 요구하는 이 넌센스 앞에서, 대한민국의 수많은 혁신 기술은 시장의 문턱도 넘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다.
1. 119조 원 R&D 투자의 그늘, '사업화 성공률 16%'의 진실
대한민국의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2023년 기준 119조 원으로 세계 5위 수준이다. 하지만 그 화려한 숫자 뒤에는 '사업화 성공률 16.4%'라는 초라한 성적표가 숨어 있다.
국가적 역량을 쏟아부어 혁신 기술을 만들어내고도, 정작 시장에서는 그 기술을 받아줄 토양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창업자들이 가장 절망하는 순간은 기술력이 부족할 때가 아니라, 기술을 검증해 줄 '첫 번째 무대'를 찾지 못할 때다.
국내 기업들은 리스크를 피하고자 "외국에서 먼저 검증받아 오라"고 말하고,
창업자들은 결국 국내 시장을 포기한 채 해외로 기술을 헐값에 넘긴다.
이후 그 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우리가 다시 비싼 값에 역수입하는 기형적인 산업 구조는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비극이 되었다.
2. '지원'이라는 이름의 방관, 창업자를 사지로 내모는 소액 지원금
그동안 정부의 창업 지원은 주로 '입구'에만 집중되어 왔다.
누구나 창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찔끔 지원하는 방식은 언뜻 보기엔 기회의 확대처럼 보이지만, '출구'인 판로가 막힌 상태에서의 지원은 결국 예산 낭비에 불과하다.
준비되지 않은 시장에 던져진 창업자들은 지원금을 소진한 뒤 매출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이 과정에서 창업자들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국가적으로는 소중한 인적·물적 자산을 잃게 된다.
진정한 기술입국을 원한다면 단순히 돈을 쥐어주는 '보조'를 넘어, 그들이 만든 제품이 실제로 쓰일 수 있는 '생태계'를 보장해야 한다.
3. 정부가 '첫 번째 고객'이 되어야 하는 이유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중소벤처기업부와 조달청이 추진하는 ‘정부 첫 실증·구매 프로젝트’는 정책적 패러다임의 중대한 전환을 의미한다.
정부가 스타트업을 시혜적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혁신할 파트너이자 '공급자'로 재정의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첫 고객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 몇 개를 사준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조달청이 앞장서서 행정부,국방부 등 정부 기관이나 정부 투자 공공기관, 정부 지원 기업 등 실제 행정 현장이 스타트업의 시험대(Test-bed)가 되어줌으로써, 민간 시장이 요구하는 '신뢰성'이라는 인장을 정부가 대신 찍어주는 것이다.
특히 실증(PoC)이 구매로, 더 나아가 글로벌 진출로 이어지는 '전주기 흐름'을 설계한 것은 스타트업의 가장 가려운 곳을 정확히 짚어낸 처방이다.
4. 제언: 시스템의 진화 없이는 미래도 없다
대한민국이 글로벌 AI 전쟁과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레퍼런스 잔혹사'를 끝낼 강력한 시스템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 첫째, '레퍼런스 맹신'을 '기술 검증'으로 대체해야 한다.
- 신제품의 미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국내외 전문가 심사 기구를 상설화해야 한다.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국가가 보증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해야 한다.
- 둘째, 공공기관의 '적극 행정'이 필수적이다.
- 공무원과 공공기관 담당자들이 실패에 대한 책무에서 벗어나, 혁신 제품을 우선 도입할 수 있도록 면책 범위를 확대하고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
- 셋째, 장기적이고 연속적인 기술 지원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 개발 단계부터 검증, 구매, 그리고 유지보수까지 이어지는 긴 호흡의 파트너십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연구실의 데이터가 아니라, 그 데이터가 실제 현장에서 구현될 때 결정된다. 정부가 앞장서서 스타트업의 손을 잡고 "우리가 첫 번째 고객이다"라고 선언할 때,
개발자들은 비로소 마음 놓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다.
넌센스 같은 레퍼런스 요구에 혁신이 꺾이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국가창업시대'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