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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일(國恥日)

산타뉴스서정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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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경술(庚戌)국치

그 무덥던 경술년 여름의 끝자락, 조선천지 장터에 퍼진 소식.
“나라가 망했다.”
천지창조의 괘를 머금은 태극기는 내려지고,샛빨간 왜놈 깃발이 바람에 남의 땅에 펄럭였다.
임금님은 허수아비였고, 낯짝 두꺼운 친일배 고관대작놈들은 똥배를 두드렸고,
충신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국치의 한을 달랬다.


우리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이름을 빼앗꼈다. 교과서 속 천왕은 하늘의 아들이 되었고,
우리말은 금지 되었다. 
나라 없는 백성의 삶, 호칭은 조롱하는 왜놈말 조센징,이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속으로 우리는 다짐했다.나라가 없어도 민족혼은 꺼지지 않으리라.

 

그 다짐은 3•1기미만세 함성으로,조선 천지를 흔들었고,광야의 독립군 총성으로 다시 살아났다.
안중근 의사의 총알은 왜놈 총독 이또 히로부미의 심장에 박혔고,

윤봉길 의사의 총알은 홍구공원에서 왜놈 고관들의 혼구멍을 뚫었다.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은 만주와 연해주에 신출귀몰하며 왜놈 천왕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제2부 역사의 눈에 비친 국치 

 

사비성 앞 황산벌 흙바람 속에,남편과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계백장군의 오천 결사대는 용맹했으나 중과부적이라는 진리를 이길 수 없어서 황산벌에서 김유신 장군의 3만 대군과 대항하여 전원이 산화했다. 불타는 사비성 위로, 왕의 항복 소식이 바람처럼 흘렸다. 
“백제는 이제 없다.” 의자왕은 소정방 때놈 장군 뒤 수레위에 구금(拘禁)되어 끌려갔다.


그날부터 우리의 이름은 물건너 낯선 당나라 땅에 흩어졌다. 천 년 산천이 무너질 리 없다고 믿었건만, 평양성의 성벽은 무너지고, 쇠사슬이 젊은이들의 손목을 묶었다.
살수에서 수나라 군사 3십만을 수장시킨 을지문덕 장군의 지략이 청사에 빛나고,안시성에서 당나라 3십만 대군이 흙으로 쌓은 토성을 맞 쌓은 장대성을 역이용하여 점령하고 당태종의 왼쪽 눈깔을 꿰뚫은 연개소문 대막리지와 양만춘 장군의 군사전략과 궁술은 고구려의 긍지이다.
노인은 땅을 치며 통곡했으나, 당나라의 깃발과 신라의 군마가 그 울음을 짓밟았다.
“고구려는 없다.” 

 

천년의 노래가 스스로 끝났다. 경순왕은 고려에 나라를 들어 바쳤고,마이태자는 금강산에 들어가서,부끄럽다고 고려 밥을 먹지않고 사라졌다.성안은 고요했으나 백성들의 가슴속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굶주림에 지쳐 더는 울지도 못하는 우리는,그저 새로운 나라가 우리를 살려 주길 바랐다.
“신라는 없다.”이제 우리는 고려 사람이 되었다.

 

남은 것은 오직 흩어진 백성의 눈물뿐 상경의 하늘이 불게 타올랐다. 거란의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흔들고 우리는 한 줄로 묶여서 끌려갔다. 아이의 울음, 여인과 노인의 신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남쪽으로 도망친 백성들, “고려가 우리를 받아 주리라.”그러나 발해라는 이름은 찬바람에 흩어졌다.

 

장터의 소문, “새 왕조가 선다.”공양왕은 물러나고,송도 궁궐에 새로운 깃발이 나부꼈다.
칼부림은 적었으나,충신의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정몽주는 만고 충신의 반열이고,왕씨는 살아남기 위하여 성을 바꿔야만 했다.

“고려는 없다.”하지만 Korea로 남아서 대한민국의 만국어 이름이 되어 있다.

 

8월 29일은 국치일 입니다. 

오직 1910년 8월 29일만 국치일 이겠습니까?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위에 백제, 고구려, 발해, 통일신라와 고려의 국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한나라의 백성 된 자로서 국치는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이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국치일에 짧은 단상을 적어 봅니다. 

 

不肖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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