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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 위에 꽃핀 한민족의 뿌리 – 카자흐스탄 고려인과 K-Park의 의미”

남철희 발행인
입력

1937년 가을, 연해주에 살던 17만 명의 조선인들은 소련 당국의 명령에 따라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일제와 내통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차에 실려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였다. 집도 없고, 농지도 없는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고려인들에게 첫 겨울은 생존의 투쟁이었다.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추위,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논농사를 도입해 쌀을 재배하며 새로운 생존의 길을 열었다. ‘김병화’로 대표되는 농업 지도자들의 노력은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식량 생산지로 만들었고, 고려인들은 “근면한 농부 민족”이라는 신뢰를 얻었다.

 

또한 고려인 사회는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주민들이었지만, 부모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 결과 고려인 2세, 3세들은 학자, 예술가, 외교관, 의사, 엔지니어로 성장하며 카자흐 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이는 단순한 이주민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문화적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주류 사회에 통합된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 정착 당시 고려인들은 언어 장벽과 사회적 차별 속에서 고통을 겪었다. ‘낯선 이방인’으로 불리며 주변부로 밀려났고, 한국어는 점점 사라져 갔다. 지금도 젊은 세대 상당수는 러시아어와 카자흐어로만 생활하며, 뿌리에 대한 의식이 옅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최근 알마티 근교에 건설되고 있는 ‘K-Park 한류 복합단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공간이 아니라, 고려인의 강제 이주와 정착의 역사를 기념하고, 한국과 카자흐스탄 간의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K-Park은 약 10헥타르 부지 위에 전통 한옥, 고려인 역사관, 야외 공연장, 문화정원, 어린이 놀이터와 스포츠 시설까지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된다. 단지 안에는 고려인들의 고난과 성취를 기억하는 기념비도 세워진다. 완공 목표는 2027년 가을이며, 연간 35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유치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단순한 관광 시설 이상의 상징성을 지닌다. 고려인들에게는 “우리가 여기서 뿌리내리고 살아왔다”는 자긍심을 일깨우고, 한국과 카자흐 양국 국민들에게는 100년 전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갈 계기가 된다. 또한, 한류 문화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바탕으로 카자흐스탄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문화 교류의 허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의 명령 한 장으로 시작된 강제 이주는 수많은 희생과 눈물을 남겼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피워냈다. 이제 그 뿌리는 한류라는 새로운 문화적 날개를 달고 다시금 세계로 뻗어 나가려 한다. 카자흐스탄의 스텝 위에 세워질 K-Park은 단지 한류의 상징이 아니라, 고려인 공동체의 기억과 미래, 그리고 한국과 카자흐스탄이 공유하는 역사의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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