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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의 수필 향기] 길, 잠시 멈춤 - 김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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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의 수필 향기] 길, 잠시 멈춤 - 김용순

김영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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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길어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전라도 길'에 나오는 길을 떠올리면 너무나 길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천안天安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잘름거리며 

        가는 길

 

    하룻길이 긴 날은 욕망이 분출하던 서른 무렵으로 돌아갈 때가 있다. 한하운의 황톳길을 걷는다...

 

여행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가는 길, 옛날 한성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던 기나긴 길에 천안삼거리가 있다. 천안삼거리를 지나는 길은 너무나 멀어서 막걸리에 국밥까지 준비된 주막이 있었다. 주막 옆으로는 우거진 능수버들이 그늘을 만들어 퇴약볕에 지친 나그네를 쉬게 했다.  '전라도의 길'의 화자도 능수버들 아래서 지까다비를 벗었단다. 벗고 보니 발가락 두 개가 떨어졌더라나. 그렇게 먼 길 걸어온 발을 쉬게 하던 곳이 천안삼거리이다. 

    

    천안삼거리는 조선시대부터 주요 길목이었다. 대전, 대구, 부산으로 이어지는 영남 방면과 논산, 전주, 광주로 이어지는 호남 방면 도로가 천안삼거리에서 갈라지고 합류하여 위로는 수원, 과천, 사당으로 향하여 서울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짚신 달랑거리는 괴나리봇짐 진 수많은 나그네가 만나고 헤어지던 곳이 천안삼거리이다. 

 

    천안삼거리의 능수버들이 처음부터 휘휘 늘어졌던 건 아니란다. 길이 만남과 이별의 장소인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전해오는 능소이야기가 있는데, 거기에 능수나무 지팡이가 등장한다. 능소 아버지 유봉이서는 변방을 지키라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홀로 키우던 어린 딸과 길을 나선다. 천안삼거리에 이르러 더는 데려갈 수 없기에 주막에 딸을 맡긴다. 능수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이 나무가 무성히 자라면 돌아온다고 딸을 달랬다.  

천안삼거리의 전설 [ 이미지: 류우강 기자]

      능수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가지가 자라는 동안 능소도 여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과거길에 주막에 들른 박현수 도령과 인연이 닿아 애틋한 사랑도 커간다. 능수나무 지팡이에 싹이 나고 자라자 과연 부녀상봉이 이어진다. 이후 무성한 능수버들은 해마다 씨앗을 날려 천안삼거리 주위에 능수나무 군락을 이루었단다. 

 

    1980년 무렵에는 천안삼거리에서 천안삼거리 문화제가 열렸다. 여러 프로그램 중에 능소아가씨 선발대회가 특히 성황이었다. 천안삼거리 문화제는 천안흥타령춤 축제로 이어져 오며 이제는 세계 춤꾼들의 잔치가 되었다. 평상시에는 공원화된 천안삼거리가 오가는 나그네뿐 아니라 천안시민들에게 쉼터 역할을 한다. 

 

    우리들의 하루하루가 길 아닌가. 길고 험한 인생길. 목마른 하룻길의 샘터로, 때로는 잔치마당으로 존재하는 천안삼거리. 시가지의 확장으로 능소가 살던 주막에는 학교가 들어서고 현재의 천안삼거리는 굳이 따지자면 삼룡사거리이다. 그러나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휘늘어진 능수버들 솔솔바람 시원해요. 쉬다 가세요."

 

    - 김용순의 '길, 잠시 멈춤'에서

 

    [수필 읽기]

 

    하룻길이 긴 날은, 욕망이 분출하던 서른 무렵으로 돌아갈 때가 있다. 작가는  한하운의 황톳길을 걷는다. 

 

    천안삼거리에 얽힌 이야기와 현재의 모습까지 떠올려보는 재미가 있다. 경기 민요 흥타령이 "천안 삼거리 흥~"으로 시작하고, 그래서 이 민요의 제목이 '천안삼거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축제이름도 '천안흥타령춤축제'이다. 천안삼거리였던 자리에는 현재 천안삼거리초등학교가 들어서 길목은 막혔다고 한다. 

 

    '서른 즈음에' 관한 노래가 있다. 풋풋한 20대를 바쁘게 지나고 서른 즈음 되어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을 문득 느꼈을 때, 지난 20대 때를 돌아보게 되는 노래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 십 년이 후딱 지났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의 허무.  30대가 40대가 되고, 40대가 50대가 되어 있을 때도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시간은 잡고 있을 수 없는, 흘러가는 것. 그래서 또 가수 나훈아의 '청춘을 돌려 다오' 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또 하루 멀어져 간다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김광석 노래, '서른 즈음에' 

 

    시간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  즐겁고 행복할 때는 시간이 빨리 가고, 슬프고 힘들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낀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즐겁기 위해서도 가지만, 가슴 속에 가득 찬 슬픔이나 번뇌들을 그 곳에 놓고 오기 위해서 어디론 가 떠나기도 한다. 

 

천안삼거리 공원 [사진: 천안시청 누리집 ]
천안삼거리 공원 [사진: 천안시청 누리집 ]

    고속도로를 지나다가 꼭 들르게 되는 곳이 천안휴게소이다.  천안휴게소에는 유명한 호두과자가 있다. 천안 호두과자는 속이 팥으로 가득 차고 큼지막한 호두가 박혀있어서 고소함과 달콤함이 있는 과자다. 그래서 휴게소를 들를 때는 몇 봉지씩 사 들고 집으로 오곤 한다. 집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주기 위해, 아니면 집으로 오는 동안 호두과자는 심심함을 달래주는 여행길의 한 추억이 된다. 이제 천안휴게소는 천안호두휴게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천안호두휴게소는 부산 방향만, 천안삼거리휴게소는 서울방향만 있다. 다음에 천안에 가게 되면 천안삼거리의 능수버들을 찾아 보고 싶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 위에서 살다가 언젠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하루하루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오늘 조금 힘들어도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노력한다.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잠시 멈추고 나를 돌아보자. 그리고 우리,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자. 

 

*지까다비地下足袋 : 신발 바닥에 고무판을 깔고, 엄지발가락과 나머지 발가락이 나뉘어 있는 작업노동용의 신발로, 신을 신지 않고 곧바로 흙 위를 걷기 위한 '신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김영희의 수필 향기]는 매주 목요일 아침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영희  수필가, 코리아아트뉴스 칼럼니스트, 문학전문 기자  
 

충남 공주에서 태어남 
수필가, 서예가, 캘리그라피 작가, 시서화 ,웃음행복코치,

레크리에이션지도자, 명상가 요가생활체조
<수필과비평> 수필 신인상 수상
신협-여성조선  '내 인생의 어부바' 공모전 수상
한용운문학상 수필 중견부문 수상
한글서예 공모전 입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과비평 회원

[ 이 칼럼은 제휴매체인 코리아아트뉴스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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