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근 관장, 청년 시각장애인에 유도로 건넨 두 번째 인생

“운동장에서 다시 일어섰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경북 포항에서 활동 중인 김일근(59) 경북시각장애인복지관장은 실명 판정을 받은 뒤 유도로 인생의 방향을 바꿨고, 지금은 청년 시각장애인들의 재활과 자립을 돕는 지도자로 서 있다.
김 관장은 1996년 애틀랜타 장애인올림픽 동메달, 1998년 방콕 장애인아시안게임 은메달,
2002년 부산 장애인아시안게임 동메달을 획득한 전 국가대표 선수다.
은퇴 이후에는 경북시각장애인복지관장, 경북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 등을 맡으며 재능기부와 장학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권투 소년에서 시각장애 1등급 판정까지
고교 시절 그는 권투 세계 챔피언을 꿈꾸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과도한 체중 조절 과정에서 발병한 베체트병으로 시력을 잃었다.
시각장애 1등급 판정은 삶의 궤적을 완전히 바꿨다.
한때 깊은 실의에 빠졌지만, 그는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권투 대신 선택한 종목은 유도였다. 상대의 체온과 움직임,
미세한 균형 변화를 읽는 감각에 집중했다.
그 결과 국내외 대회에서 잇따라 메달을 획득하며 장애인 유도계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 잡았다.
‘동병상련’으로 청년을 일으키다
선수 은퇴 후 김 관장이 선택한 길은 지도자였다.
그는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서 시각장애 청년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대상은 20~30대 청년들이었다.
실명 이후 삶의 방향을 잃은 이들이 많았다.
김 관장은 “같은 아픔을 겪은 선배”로서 유도를 가르쳤다.
기술 이전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 회복이었다.
그가 지도한 제자들 중 일부는 국내외 장애인 대회에서 입상했다.
경북 지역 시각장애인 유도는 선수층이 확대되며 저변이 넓어졌다.
체육 인프라 구축과 제도 개선
김 관장의 활동은 개인 지도에 그치지 않았다.
-(사)경북시각장애인연합회 운영 참여
-경북시각장애인스포츠연맹 활성화
-포항시장애인체육회 창립 운동 주도
특히 포항시장애인체육회 설립 과정에서는 예산 부족과 지역사회의 무관심이라는
현실적 장벽에 부딪혔다.
여러 차례 무산 위기를 겪었지만, 체육회는 결국 출범했다.
이후 포항 지역 장애인 생활체육과 엘리트 체육 지원 체계가 정비됐다.
이는 지역 장애인 스포츠 행정의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교육·취업으로 이어진 변화
2010년 그는 포항 선린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
현장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함께 공부한 시각장애 학생들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일부는 운동 지도자로, 일부는 복지 현장 실무자로 진출했다.
김 관장은 시각장애인의 직업 선택 폭이 좁아진 현실도 지적한다.
안마업 중심의 직업 구조와 사회적 편견이 여전히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더 큰 장애”라고 그는 말한다.
14년간 204명 장학 지원
김 관장은 2012년 이후 시각장애 아동과 장애 가정 자녀를 위한 장학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까지 14년간 총 204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금액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교육 기회를 통해 자립 기반을 마련하자는 취지다.
장학사업의 목적은 명확하다.
장애가 학업 중단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지원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장애는 불편일 뿐, 포기의 이유는 아니다”
김 관장은 스스로를 ‘오뚝이 관장’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실명, 재활, 국제대회, 행정 조직 설립, 교육, 장학사업까지
그의 이력은 단절이 아니라 전환의 기록에 가깝다.
그는 말한다.
“장애는 약간 불편할 뿐입니다. 강한 의지를 갖고 준비하면 미래는 반드시 열립니다.”
누군가에게는 격려 문장일 수 있다.
하지만 청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이미 증명된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