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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젊음이여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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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밖 청춘들을 위한 찬가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한 의미있는 여정이다.

“꿈이 없어도 괜찮아, 멈춰서도 괜찮아.”


방탄소년단의 노래 ‘낙원’ 속 이 한 문장은, 성취를 향해 쉼 없이 달려야만 한다고 믿어온 사회에 조용한 균열을 낸다. 

멈춤을 실패로 간주하는 세계에서, 이 말은 하나의 사유가 된다. 과연 우리는 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가.
 

오늘의 청춘은 유난히 가파른 경사 위에 서 있다. 

노력은 더 많이 요구되지만, 성취의 문은 더 좁아졌다. 학력은 상향 평준화됐고, 경쟁은 일상이 되었으며, ‘평균’이라는 기준조차 이미 높은 문턱이 되었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속도를 내고, 누군가는 뒤처지며, 또 다른 누군가는 아예 궤도 밖으로 밀려난다. 우리는 흔히 그들을 ‘포기한 청춘’이라 부르지만, 그 표현은 지나치게 단정적이다. 

어쩌면 그들은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삶을 ‘부조리’라 불렀다. 

노력과 결과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세계, 의미를 갈망하지만 쉽게 발견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러나 카뮈는 그 부조리를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자유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반드시 의미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궤도 밖 청춘들은 어쩌면 이 지점에 서 있다. 

정해진 궤도를 벗어난 자리에서, 그들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왜 꼭 저 길이어야 하는가”, “나의 속도는 왜 인정받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재정의다. 

남들과 다른 리듬으로 걷는 이들이야말로, 삶의 다양성을 증명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사회는 여전히 직선의 서사를 선호한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일정한 소득. 그러나 삶은 본래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때로는 멈춤과 후퇴를 통해 더 깊어진다. 

씨앗이 땅속에서 긴 시간을 머무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준비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떤 성장도 가능하지 않다.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조차,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가 자라고 있는 시간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한다. 

‘성공’이라는 단어 대신 ‘지속’을, ‘속도’ 대신 ‘방향’을 묻는 언어다. 

남들과 비교해 빠른가보다, 나에게 맞는가를 묻는 질문이 더 중요해져야 한다. 

궤도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사회는, 

결국 자신이 만든 기준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청춘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채찍이 아니라, 멈출 수 있는 권리다. 

쉬어도 괜찮고, 돌아가도 괜찮으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조차 존중받아야 한다. 

그 여백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타인의 속도를 이해하게 된다.
 

‘낙원’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선언이다. 

꿈이 없어도 잠시 멈춰 있어도, 인간의 존엄은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는 선언. 

궤도 밖 청춘들을 향한 이 찬가는 결국 우리 모두를 향한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여정이다.
 

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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