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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쳐 장기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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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쳐 장기려 박사

남철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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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의사, 장기려 박사의 생애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는 1911105일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6·25 전쟁 중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평양도립병원장과 평양의과대학 외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을 결심했다. 하지만 가족 전체가 함께 피난하지 못하고, 둘째 아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는 19951225,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비극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의료인의 신념

 

장기려 박사는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의료인의 본분을 다했다. 평양 폭격 중 부상당한 49명의 환자를 끝까지 수술하며 생명을 살렸고, 남북이 갈라지면서 가족과 생이별한 후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부산으로 내려와 교회 창고에 천막을 치고 무료 복음병원을 운영하며 피란민들에게 치료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의 헌신은 단순한 의술이 아니었다. 의료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로 삼았다. 그리고 이 작은 천막 병원은 훗날 고신 복음병원으로 성장하며 수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나눔의 삶

 

장 박사의 삶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축은 투철한 신앙과 사랑이었다. 그는 주일마다 성경 모임을 주관하며 사람들에게 나눔과 사랑의 가치를 전했고, 월간 전도지 「부산 모임」을 발간하여 신앙적 가르침을 퍼뜨렸다. 해마다 하기 수양회를 이끌며 많은 이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했고, 마지막에는 종의 모임에 참여하며 영원한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을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도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될 때, 정부는 그에게 특별 상봉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다른 이산가족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거절했다.


그의 신념은 단순한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더 큰 사랑과 희생의 실천이었다. 그는 가족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자신보다 더 절박한 이산가족들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45년 동안 재혼하지 않고 평생을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주변에서 재혼을 권유했지만, 그는 내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의 삶은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깊은 신앙과 사랑의 실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 속에서도 그는 이웃을 위한 봉사와 나눔을 선택하며, 평생을 의료 봉사와 사회적 헌신에 바쳤다.

 

후세에 남긴 사랑의 편지

 

그의 생애는 의술을 넘어선 인류애와 나눔의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기록이었다. 오늘날에도 장기려 박사의 정신은 이어지고 있으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 수많은 의료인이 봉사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온유함과 겸손, 성실과 신의의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그 모든 순간마다 신앙의 숨결이 깃들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뜻을 좇아, 그는 평생을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며 자신의 것을 내어주었다.

 

장기려 박사는 한국 의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의사였다. 그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받지 않고 수술을 해 주었으며, 무료 진료를 통해 의료의 기본 정신을 실천했다


장 박사는 단순히 의사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서 의료보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실천하며, 한국의 의료복지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사랑과 희생의 연속이었으며,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칭도 붙었다.

 

그의 숭고한 정신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천막 병원 운영: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온 장 박사는 교회 창고에 천막을 치고 병원을 운영하며 피란민들을 치료했다. 하루 200여 명의 환자가 몰려들었지만, 그는 힘든 내색 없이 무료 진료를 이어갔다.


치료비 없는 환자에게 뒷문을 열어줌: 치료를 받은 후 돈이 없어 눈치를 보는 환자에게 병원 뒷문을 열어주며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돈이 없어도 괜찮으니 며칠 뒤 꼭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영양실조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 지급: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가 돈이 없어 먹을 걸 구할 수 없다고 하자, 장 박사는 처방전 대신 닭 두 마리 값을 내어주었다.

걸인에게 월급 수표를 통째로 줌: 길에서 돈을 구걸하는 걸인을 만나자, 그는 자신의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그대로 건네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설립: 무료 진료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난한 국민들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다.

그는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의료의 본질이 단순한 치료를 넘어 사랑과 나눔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많은 의료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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